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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글 속의 세상

by 대낮

친구와 전화통화 하면서 서로 최근에 겪은 잡다한 일을 얘기했다. 요약하자면, 세상사가 내 맘과 다르다는 하소연이었다.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다가, 둘은 세상이 원래 그런 모양이라는 결론을 냈다.

전화를 끊고 한참 생각하니 좀 우스웠다. 세상은 뭐고, 원래 그런 걸 뭘까.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어했다는 따뜻함만 기억하면 될 일이지만.


'세상'이라는 말에는 여러 뜻이 있다. 저마다 개인적으로 부여하는 의미 말고, 사회에서 약속한 사전적 의미만 해도 여덟 가지나 된다. 사전에 나온 첫 번째 뜻은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사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 예문으로 열 개나 나열돼 있는데, 그중 마지막이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더라"이다.

'세상'은 공간적인 의미뿐 아니라 '인심'이라는 뜻도 있다. 사전에는 다섯 번째 뜻으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 =세상인심"이 나온다. "세상이 각박하다"라고 쓰면 공간이 아니라 세상인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세상인심'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것이다. '세상인심'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뜻풀이가 돼 있고, '세상'이라는 단어와 유사하다는 표시가 있다.

'세상'은 품사로는 명사인데, 부사처럼 쓰일 때도 있다. 다시 사전에 나온 문장으로 예를 들자면, "세상 좋은 물건"과 같이 쓸 수 있다. 여기서 '세상'은 '비할 바 없이', '아주'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좀 긍정적인 느낌이다. 마찬가지로 부사적 용법인데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타일러도 세상 말을 들어야지"와 같은 문장에서는 '도무지', '조금도'와 같은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인다.


'세상'이라는 단어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겉과 속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갖가지 시선이 골고루 담겨 있다. 오랫동안 사용되는 '말'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담뿍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글 속의 세상은 실제 세상과는 좀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건 책에나 나오는 말이지"라고 하기도 한다.

글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쓰는 듯하지만, 사실은 내 글을 읽어 줄(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대상으로 적기 마련이다. 그래서 저자는 '내 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고, 생각이나 논거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검열하기도 한다. 이때 저자가 생각하는 '내 편'은 다수가 아닐 수도 있다. 글 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단단해지는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글쓰기가 자기 위로이자 명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생각해 보면, 종이 위 글자에 갇힌 글은 그 어떤 매체보다 폐쇄적이다. 글의 내용이 현실에 맞든 틀리든 책 속의 세상은 글 바깥보다 질서 정연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쓰면 그 글 속에서는 그것으로 완성인 것이다. '너'의 입장이나 거절 표시는 내가 적지 않는 한 글에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쓴 글만 읽고 있고, 취향에 맞는 글만 읽으면 아집에 빠지기도 쉽다. 나는 교정 작업이 많을 때는 사람과 만나서 말로 소통하는 세상보다 글자로 만나는 글 속의 세상에서 하루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낸다. 실제 세상보다 글 속 세상을 더 편하게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아마도 내 안에 편견과 아집이 많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본다(나 아닌 다른 훌륭한 사람들은 편견과 아집이 아니라 줏대와 지조일 수 있겠다.)

오늘 나는 친구에게 세상사가 내 맘과 다르다고 하소연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해 달라고. 그렇지만 재밌는 건 나는 늘 그 친구에게만 이런 걸 물어본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풉.

이 글을 정리해 적으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리던 평화로운 글 속 세상이 깨졌다면, 다음 장에 무엇을 적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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