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지 몰라

by 대낮

정수기 점검 카드를 보니 지난 3년간 12번 점검을 했고, 담당자 이름이 다 같았다. 그런데 나는 계속해서 같은 분이 우리 집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집에 있을 때 온 건데도. 만날 때마다 초면인 듯 맞으며 인사했다. 지금도 그분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신경 써서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얼굴을 알 수 없는 거구나. 12번 본 사람을 못 알아본다는 게 조금 당황스러워서 이 상황을 AI에게 물어봤다.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냐고. 그렇단다. 기계의 조언은 이랬다.

"아, 내 뇌가 에너지를 아주 아껴 쓰는 타입이구나!" 하고 가볍게 넘겨보시는 건 어떨까요?

남편의 조언은 이랬다.

"ㅎㅎ 멀 새삼스럽게."

예전부터 이랬다는 것이니, 노화의 징후로 생각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개인적인 일이지만...

AI의 대답은 계속 마음에 남네. 사람을 만나도 기억하지 않고, 알아보지 않는 게 뇌의 효율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인간 정신의 노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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