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신중하려고 참다 보면 생이 끝나지.
첫 직장 다니던 시절에 어느 날 밤 꿨던 꿈 속에서 들은 말이다. 대학 때 전공 교수님이 꿈에 나와서 그냥 이 한 마디를 해주셨다. 전화로 들은 것처럼 생생했다. 내가 들은 게 '생'이었는지 '삶'이었는지 생각해 봤다. '생'인 것 같았다. 이 글을 쓰며 습관대로 사전을 찾았다. 생의 두 번째 뜻은 이렇다.
사는 일. 또는 살아 있음. =삶.
내가 생각한 것은 "살아 있음"의 의미다. 어떤 것이 살아 있는 삶일까. 꿈에 나온 교수님이 평소 하셨던 말씀 중에 인상 깊었던 게 있다. 식사는 인간의 가장 동물적인 활동인데, 그걸 같이 한다는 것은 대단히 친밀한 교류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을 떠올리자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서로의 몸에 어떤 음식이 들어가는지 살피고 챙긴다.
교수님과 식사하면서 나는 이것이 인간이라는 생물로서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가까워지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 식사도 친화의 의미는 있지만 뭔가 다르다. 가족이나 연인과의 식사에서 갖는 공동 운명체로서 상대의 건강이 내 건강과 직결되는 그런 느낌은 없었다.
일로 만난 사람 사이의 식사라면 본능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다. 가끔은 짧은 연극 무대 같기도 하다. 앞에 앉은 사람이 무언가 결정해 줘야 하는 상황이라면 호흡마저 자연스럽지 않다. 나는 누구와 무엇을 먹으며 살아가야 할까.
첫 직장 다닐 때 나는 심각한 '진지충'이었다. 그래서 아마 저런 꿈을 꾼 게 아닐까. 생각이 지나치게 많으면 옴짝달싹 못한다. 연애를 시작할 때, 이직을 결심할 때 나는 꿈에서 들은 저 말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지금 깊고 신중하려고 어떤 마음을 참는 것인지. 깊고 신중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닌지. 그 뒤에는 어떤 '생'이 오는지.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너무 진지한 쪽에 가깝다. 의미를 곱씹느라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다.
오늘 낮에 딸이 같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최우식 나오는 영화 얘기였다. 멜로무비였나.
"최우식 형이 좋아하는 것도 없고 사람도 잘 안 만나거든. 그러다 죽어."
두 문장 사이는 인과관계가 아닌데, 그런 것 같은 억양으로 말이 나와서 딸과 나는 갑자기 막 웃었다. 딸은 평소 나의 낮은 사회성을 놀린다. 사람들 안 만난다고. 웃는 바람에 뒷 얘기는 못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진짜 두 문장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면 웃을 일만은 아니다.
방학이라 하루에 세 번 밥을 차린다. 세 번 아이들과 마주 앉는다. 딸은 나더러 사람 만나기 귀찮아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 삶에서 중요한 사람들과 매일 식탁에서 만나고 있다. 딸이 그걸 모를 뿐. 하지만 내가 "깊고 신중"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야 하는 것은 맞다. 내게 참고 있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야 하는 것도 맞다.
밤에는 온라인 모임이 있었다. 외주출판인 모임의 교정교열분과 사람들과 만났다. 새로 알게 된 한 분이 러닝을 권했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으로 하라고. 나도 시도했지만 꾸준히 하기 어려웠다고 하자 쉽게 하라고 했다. 운동화를 신는다는 생각으로.
운동 전체를 생각하면 시작이 어렵다. 깊고 신중하다 보면 참게 되는 것처럼. 러닝이 어려울 것 같더라도 일단 운동화를 신어야지. 과연 문을 열고 나가게 될지 해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