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희 Sep 28. 2021

초량 동네사람들(1)

<<인생길 행복한 동반자들>>

영주동과 수정동 사이 초량동 산복도로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52번 버스를 타고 선화여상 앞에 내려  산복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벚꽃나무와  우거진 숲길이 있었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때는 산복도로 아래위로 다 숲길이 우거진  조용한 길이라 밤는 조금 무섭기도 한 길이었다.


52번을 타고 선화여상 앞에서 내리면  산복도로를 다니는 유일한 버스 86번을  만날 수 있다.

이 86번을 갈아타고  두 코스를 가면 산복도로 밑에 조그만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그 옛날 파 난민들이 세운 작은 교회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이 교회 나가게 되었다.


 수정동에서 시작된 산복도로는 초량동과 영주동을 관통하며  대신동으로 이어졌다.

피난민들이 살던   판잣집들이 산복도로  위아래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마을들...

86번이 유일한 교통수단인 그 높은 산복도로 너머엔  멀리 부산 앞바다가 보이고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산복도로  밑의 판잣집들.... 담도 없고 옆집 벽이 이웃집 부엌 벽이 되는 낮고 허름한 판잣집들...

 그 작고 허름한 판자 집사람들이 다니던 예배당...


마당도 없고 대문도 없는.... 부엌이나 방문을 열면 바로 좁은 골목길이 있고 그 밑으로 또 다른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렇게 층층의 집들이 아슬아슬이 연결되어 있고 초량동  아래 길에서 산복도로 위까지 올라가려면 100계단이 넘는 좁은 계단을 몇 번을 올라야  했다.


산복도로 바로 밑에 그 작은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 판자촌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다.

예배 반주를 맡아 봉사하면서  주말엔  거의 교회에 붙어있어야 해서 이사를 오개됐다

그전에 살던 초읍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버스를 세 번을 갈아 타야 해서 주일엔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다. 중간에 집에 갔다 오기엔 너무 멀어 하루 종일 예배당과  목사님 댁에  있다가 저녁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면  파 감치가  되었다.


교회  성도들과  친구들이  가까이  이사 오기를  권해서 예배당 가까운 곳으로 집을 구하다 보니  예배당  바로  밑에  있는 골목길 끝집을  얻게 되었다.  예배당 바로  위가  산복도로이고  86번  버스정류장이 바로 코앞에 있어  환경은 좀 열악했지만 이 판자촌에  이사 오게  된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 집의 막내아들 떠꺼머리 총각이 함께 살고 있는 작은 판자 집.. 문을 열면 바로 좁은 골목길이 있고  그 길 밑으로 또 다른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 앞에 작은  마루가 붙어 있고 그 마루를 사이에 두고 떠꺼머리 총각이 사는 쪽방이 있었다. 마루 바로 앞이 골목길이고 할머니네 부엌은 쪽방 뒤에 있었다. 특이하게 작은 부앞에는  물이 퐁퐁 솟아나는  작은 샘이 있었다.

 샘에서 주인 할머니는  나물도 씻고 빨래도 하곤 하셨다.


내가 살던 방은  마루 옆으로 출입구가 따로 있는 작은 부엌이 딸린 삼각형 방이었다. 문을 열면 부엌이 있고 부엌 안에 방이 있었다. 방안에 창도 없는 아주 조그마한 방이었다.

내 작은 방엔  이동식 옷장과  작은 앉은뱅이책상이  유일한 가구였다. 이 책상에서 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며  또 밥을 먹을 땐 밥상이 되도 했다.


 부엌은 방 옆으로 길쭉한 공간이 있어서 여기에  주인댁 광과 내  연탄창고가  있었다.  할머니는 이 광에 말린 나물이나 저장음식을 넣어두셨고  할아버지의 약수 통도 넣어두셨다. 나는  하루 1장씩 연탄을  피워서 그 작은방을 데웠고 연탄아궁이 위에 솥을 올려 뜨거운 물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연탄 불위에 작은 냄비를 올려 밥을 해먹기도. 했다. 지붕 위론 고양이들이 뛰어다녔고  가끔씩은  술 취한 아저씨들의 주정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 판자촌은  하루도 조용할 때가 별로 없었다

좁은 골목길이 곧  마당이요  골목길과  나란히 붙어있는 밑에 집  지붕은  고추나 나물을  말리는

곳이  돼가도  했고  빨래를  늘어놓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살던 집은 골목길  끝 산복도로로  올라가는  계단 옆이라 내방  옆으론  다른 집이  없었다


주인댁은  가난하긴 지만 정직하고 정이 많은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구봉산 약수터를 가셔서 페트병에 물을 넣어 몇 병씩 지고 오시는 게 유일한 낙이셨고  오후엔 전축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시곤 했다. 할머니는 좁은 골목길에서 나물을 다듬으며 이웃할머니들과 하루 일과를 보내곤 하셨다.


우리가 살던 판잣집은 산복도로  바로  아래에 있는 아주 높은 곳이라 집은 허름했지만 전망은 정말  멋진 곳이었다. 뷰억문을 열고 골목길에 나서면 멀리 부산 앞바다와 초량동과 수정동  영주동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특히 어둠이 내리고  집집마다 불이 켜지면  허름한 판자촌은  어로 가고 없고 점점이 아름다운  불빛이  반짝이는 멋진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저녁을 먹고 주안 댁  마루에 앉아 믹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바라다보는 밤의 풍경은 늘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가끔씩 뱃고동 소리가  불빛이 비취기 시작하어둠을 지나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울려 퍼지면 고향에 있는 엄마와 동생 둘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해지는 저녁나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작은 마루에  동그란 상을 펴놓고   식사를 하시곤 했다.

가끔씩 내가 퇴근해서 집으로 가면 저녁상을 마주하고 마루에 앉은  두 분과 만날 때가 있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마루에 올라와서 밥을 먹으라고 나를 부르시곤 하셨다.  별다른 반찬도 없고 오이를 숭덩숭덩 썰어 된장에 찍어 먹으러고 주고 산에서 떠온 시원한 물 한 그릇을 내놓으셨는데  그 소박한 밥상을 몇 번은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먹었다. 어떨 댄 퇴근하고 돌아온 그 집 막내아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공장에 다니던 그 집 막내아들은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 숙이고 밥만 먹고는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객지 생활에 사람 사는 정이 그리워서였는지 나는 별 거부감 없이 주인 할머니 가족들과 그 작은 마루에 앉아 밥을 먹곤 했다. 사실 네 명이 앉으면 마루가 꽉 찬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는 그 쪽마루에서 멀리 부산 앞바다를 보며 그 소박한 밥상을 대할 때면 난 고향에 계신 엄마와 할머니  동생들을 떠 올렸다.  그 작은 밥상을 앞에 두고 짧은 기도를 했다. 고향에 있는 엄마와 할머니 동생들과 함께 해 달라고....  그 짧은 기도는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다


주인 할머니네는 큰아들과 딸도 있었는데 큰 아들 내외는 근처에 살면서 직장도 다니지 않고 자주 할머니 댁에 와서 밥을 먹고 갈 때는 무언가를 얻어가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일한 근심거리는 늘 큰 아들 부부가 안겨주었다. 막내아들이 공장에 다니며 벌어온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데 큰 아들 부부는 일도 하지 않고 늘 할머니 댁에 와서 무언가를 요구했다. 가끔씩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올 때면 이 집 큰아들이 왔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묵묵부답으로 할머니의 한숨소리를 듣고 계셨고 가끔씩 큰 딸이 와서 큰아들 부부를 혼내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큰아들 부부에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밥을 해 먹여서 보고 큰 딸은 그런 할머니께 이제  돈 주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어느 집이나 다 근심 걱정거리가 있지만 주인 할머니네는 나이 들어서도 취직 못하고 놀고 있는 큰아들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아픔이다.

그 큰 아들 내외에게 잔소리하면서도 큰아들 부부가 집으로 돌아갈 땐 할머니는 며느리 손에 무언가라도 챙주시곤 다. 오이 한 두 개 옥수수 몇 개  계란 두세 개... 그걸 또 받아서 가는 큰 아들 부부... 그게 초량동 판잣집 사람들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할머니네 쪽방에 세 들어 살며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겨울의 긑자락이긴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 차가운 2월.... 아이들 피아노 레슨과 학습지 알바를 하며 공부하던 나에게 매달 집세를 내는 것과 한 달치 교통비는 늘 현실적인 문제였다. 어쩌다 레슨이 이어지지 않으면 집세  내는 것도 힘들 때가 있었다.  레슨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방값을 못 내고 연탄도 다 떨어져 찬방에 며칠을 자야 했다.  집세를 못 드려 할머니 얼굴을 보는 것도 죄송헤  밤늦게 들어와서 숨직이고 지내던 어느 토요일 아침... 몸도 아프고 힘도 없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부엌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목소리였다.  집세를 드리지 않아 죄송해서 나가보지도 못하고 숨죽여 누워있는데 이상하게 방바닥이 따뜻해져 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시간 넘게 부엌을 들락거리시더니 마침내 문이 닫히고 조용해졌다.  문을 닫으시면서 할머버지가  "이 겨울에  아가씨가 냉방에서 잠을 잤구먼..." 하시자 할머니가 "조용히 하소 자는데 갤라 "하시며 할아버지를 재촉해 문을 닫고 나가셨다.


한참을 숨죽여 다가 부엌에 나가보니 꺼진 연탄불을  피워놓고  연탄을 50장이나 사다 놓으다. 우리가 살던 판잣집은 산복도로에서 20계단쯤 내려와 하는 에 있는데 그 단을 두 분이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연탄을 손수  사다 놓으신 것이다. 50장이면 한 달을 불을 때고 살 수 있었는데  방값도 못 드리고 살고 있는 내게 꺼진 연탄불을 피워주고 연탄까지 사놓으신 것이었다.  연탄 불위엔 따뜻하게 씻도록  물이 담긴 커다란 솥도 올려놓아 김이 나고 있었다.  


방에 다시 들어온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외로운 객지 생활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늘 안고 살아가는 내게 두 분은 또 다른 가족으로 다가오셨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당장 방세를 못 드려 그럴 용기도  없다.

그분들의 삶도 가난하고 방세랑 막내아들이 벌어 온 돈으로 겨우 살아가시는데  정말 너무나 과분한 사랑과 은혜였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벅차오름  죄송한 마음이 한번에 서럽게 몰려와  이불속에 누워 한참을 울어야 다.


며칠 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찐빵을 사들고 방세와 연탄값을 드리러 갔다. 그러나 두 분은 방세만 받고  연탄값은 절대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이제 겨울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걸로 따뜻하게  방에 불 때고 살라며  절대로 찬방에서 자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연탄불이 꺼지면 언제던 할머니네 부엌에 와서 불을 바꿔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 가난하고 좁은 판자촌 골목에서 마음이 부자이신 그 따뜻한 가족과  2년을 같이 살았다. 그 후 결혼하고  두세 번 할머니네를 찾은 적이 있었다. 몇 년 사이 그 좁은 판잣집은  막내아들이 새로 집을지어 작은 3층 주택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을  뵌 건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자리에 누워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계실 때였다.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그 산복도로 작은 주택에서 내 손을 잡고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미소 지으시던  두 분을 그 후 더 이상 뵙지 못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주인댁 막내 아드님과 만나게 되었다.

해운대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미분양된 작은 아파트를 사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재테크엔 별로 밝지 못한 우리는 뒤에 산이 있고 앞이 확 트인 전망은 좋지만 교통이 불퍈한 아파트를  거의 대출을 끼고 사서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고 전세를 내놓았다. 당시 사택에 살고 있어서 이담에 아이가 크면 해운대로 이사 올 야무진 꿈을 세우고 대출을 갚아 나가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파트를 팔아야 할 사정이 생겼다. 지금이야 아파트값이 그때보다 6배 가까이 올랐지만 그때는 과잉공급으로 미분양된 아파트가 많아 분양가로 내놓아도 언제 팔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집을 내놓은 지 일주일 만에 모르는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꼭 우리 집을 사고 싶어 하는 손님이 있다며 바로 계약을 하자고 했다.  같은 가격에 위치 좋은 아파트가 널려 잇는데 우리 아파트를 산다고 하니  의아하기도 했지만 우린 분양가 이하는 절대 팔지 않을 거라는 말을 미리 전달하고 부동산 사무실에 갔다.  사무실에는 멋진 신사 분과 중년의 아주머님이 앉아계셨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데 두 분 다 낯이 익었다.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신사분이 웃으며  "저 모르시겠어요? 초량동 판잣집에 함께 살던,,,,"  "어머나  할아버지네 그 막네 삼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뜨꺼머리 그 막내아들은  그동안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작은 기업체의 사장님이 되어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 그 막내 아드님은 혼자 사는 누나에게 공기 좋은 곳에 있는 아파트를 하나 사주려고 왔다가 우리 아파트를 보고는 누님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바로 사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더 좋은 아파트도 많은데 왜 하필 우리 집을 사려고 하는지 묻자 누님이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초량동 집 같잖아.... 뒤에 산이 있고 앞이 확트여숨통이 확 트이잖아..."  "맞아요 전망하나는 끝내주죠 옛날 초량동 생각 나는 집이에요..."



그날 그 막네 아드님은 계약과 동시에 집값 전체를  다 주고 가셨다. 양쪽 부동산 수수료도  본인이 다 내버려서  예나 지금이나 난 신세만 진격이 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우린  근처의 낙지볶음집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을 쏙 빼닮은  막내 아드님과 누님과 함께  밥상 앞에 앉으니 그 옛날 초량 동네의 풍경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온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한가위 보름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