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프라하

프라하의 가을

by 박민희

* 다시 찾은 프라하 *


재림이가 귀국하고 2년 만에 다시 프라하를 찾았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잘츠부르크 모짤테움 음대에서 음악캠프를 참석한 후 일주일을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보냈다. 유럽 여행 중 처음으로 프라하로 입국하지 않고 비엔나로 입국해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여행을 거쳐 잘쯔에서 3주간 음악 캠프를 참가했다.


캠프가 끝나고 잘쯔를 떠나 비엔나 숲 속에서 3일을 숙박하고 기차로 프라하로 넘어왔다.

일주일간 프라하를 여행 후 귀국을 프라하 바츨라프 공항에서 했다.

약 한 달 가까이 긴 시간 동안의 여행이었다.


다시 찾은 프라하는 도로 공사로 몇 군데 트램의 노선이 바뀌기는 했지만 대부분 우리가 프라하를 떠날 때와 비슷했다. 물론 안으로는 이곳도 많은 변화의 물결 안에 있었지만 밖으로 보이는 프라하는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재림이는 여행의 와중에도 첼로 연습이 하고 싶어 숙소에 거의 머물며 첼로만 하고 있어서 혼자 트램을 타고 프라하 곳곳을 돌아다녔다. 유럽에서 혼자서 맘 놓고 돌아다녀도 불안하지 않는 유일한 두 곳 잘츠부르크와 프라하... 잘쯔는 몇 번의 여름 음악캠프를 와서 학교와 기숙사를 오가며 살았던 곳이며 또 도시가 작아 한나절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프라하는 재림이가 5년간 유학하던 곳이라 프라하 구석구석을 하도 많이 돌아다녀 모르는 곳이 거의 없었다.


주로 트램을 타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왕복으로 몇 번씩 다니며 길을 익혔다.

가장 많이 탔던 트램은 17번 24번 22번 18번 3번 7번으로 특히 17번은 블타바 강을 계속 따라 달렸기 때문에 가장 많이 탔던 것 같다 아침마다 프라하성에 가기 위해 탔던 18번은 옛날 우리가 살던 6구역 우리 집 가는 노선이기도 했다.


22번 트램 종점에서 우연히 만났던 예쁜 프라하의 주택들

24번은 꼬빌리시에 있는 니콜라스네에 가기 위해 자주 탔고 뜨로야성에 가기 위해 중간 환승을 하던 트램 이기도 했다. 3번 트램은 베트남 시장이 있는 약간 으슥한 외진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어 중간에 내려 끝까지 안 가고 다시 돌아오는 트램을 갈아타야 했고 7번은 데스코와 한인마트를 가기 위해 자주 탔다 7번을 타고 안델 역에 내리면 데스코와 다양한 쇼핑센터가 몰려 있었다. 이번에 프라하에 머물렀던 숙소가 프라하성 밑 뻬뜨르 진 공원 입구 바로 옆이어서 안델 역에 내려 데스코에 들어가 장을 보고 후문으로 나가면 바로 우리 아파트 호텔이 나와서 정말 편리하게 다녔다.


오스트리아에선 6시가 넘으면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아 정말 거리가 한산하다 못해 스산하게 느껴졌었다, 특히 주말엔 거의 모든 가게가 다 문을 열지 않아 맨 처음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금요일 오후에 도착해서 3일간 쫄쫄 굶은 적이 있었다. 정말 물도 사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어 너무 황당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서는 무조건 주중에 장을 봐서 냉장고를 가득 채워놔야 안심이 되었다. 가끔씩 학교에서 수업이 늦게 마쳐 상점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오면 학교 근처에서 장을 봐서 낑낑거리며 버스를 타고 또 내려서 기숙사까지 20분 넘게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야 했다.


그런데 프라하는 9시까지 대형 상점들이 다 오픈되어 있고 또 큰 상점들이 문을 닫아도 시내의 작은 베트남 가게들이 거의 밤새도록 영업을 해서 정말 한국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물론 24시간 편의점처럼 베트남 가게도 조금씩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급할 땐 늦게라도 장을 볼 수 있어 굶을 일은 없었다. 이번에 우리가 머물던 아파트 호텔은 데스코 바로 옆이어서 특히나 더 편리했던 것 같다.


예전에 재림이 유학시절 6구역에 살 때는 집 근처에 상점이 하나도 없는 조용한 주택가라 장을 보려면 마을 입구 리들 마켓이나 트램을 타고 데스코까지 나와야 했다. 그리고 장을 봐서 집까지 가는 길이 제법 멀어 버스에서 내려 20분 가까이 짐을 들고 걸어가야 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엔 트램과 마을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며 데스코에 가서 일주일치 식량을 사 오곤 했는데 특히 생수나 과일을 사는 날은 엄청 무거워 재림이랑 중간중간 주택가의 담장 밑에서 짐을 내려놓고 쉬어야 했다. 그 잠깐 쉬는 사이 담장 너머로 마을 주민들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정원에 피어있는 꽃들을 감상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편한 동네였는데 그땐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 그 불편함도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 6구역 우리 동네를 다시 찾았다.

우리가 살았던 마르틴 씨 댁

3층으로 된 오래된 주택과 500평 가까이 되는 넓은 정원이 있는 집

우리가 살던 3층은 한 면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있고 프라하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라

프라하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이 밤의 불빛을 간직한 프라하는 정말 아름다웠다. 멀리 블타바 강의 가로등과 강물 사이로 떠다니는 유람선들


프라하성에 어둠이 내리고 거리에 하나 둘 불빛이 켜질 때면 창가에 서서 오래 동안 그 모습을 쳐다보곤 했다.

아침엔 온 갓 새소리가 잠을 깨웠고 통유리로 비춰오는 아침햇살은 눈이 부셨다.

교통이 좀 불편하긴 했지만 그 불편함도 유럽에서 살아보는 특권이라 생각했다.


다시 찾은 동네 어귀 레스토랑 정원에는 수국이 활짝 피어 있었고 귀여운 강아지가 살던 집엔 장미 울타리가 여전히 예뻤지만 주인 내외도 강아지도 보이지 않았다. 담장 울타리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기다렸지만 귀여운 강아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마르틴 씨 부부도 시골에 가시고 안 계셔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재림이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마 여름휴가 기간이라 귀여운 강아지와 주인 내외는 독일에 갔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프라하에 살던 때에도 그 집 사람들은 가끔씩 독일에 가서 머물고 오곤 했었다.


마르틴 씨 부부와는 전화로 소식만 주고받았다.

연로하신 어머니를 돌봐 드리러 주중에는 시골에 있고 주말에만 프라하로 다시 온다고 했다. 이분들도 꽤나 연세가 많으신데 어머니께서 100세가 넘도록 아직도 정정하게 시골에서 살아 계신다고 했다. 참 대단한 분들이신 것 같다.


이 가족은 정말 대 가족이었다.

두 부부는 공예가로서 국립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셨고 지금도 왕성한 작품 활동과 전시회를 하고 계신다. 자녀들을 다 예술가로 키우셨고 손주 손녀도 굉장히 많다. 언젠가 가족사진을 보여주는데 자신들의 뿌리와 근원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주말이 되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다 본가로 와서 함께 음식을 먹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연초나 연말에는 그 대가족이 다 같이 유럽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곤 했다.


평소에도 근처에 사는 손자 손녀들이 자주 놀러 오는데. 언젠가 오후 한나절을 마르틴 씨 가족과 함께 차를 마시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손주들의 공부를 봐주시고 간식을 만들어 먹이며 많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유럽의 아이들도 우리랑 똑같은 애들인지라 때로 말썽도 피우고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그분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항상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다소 강압적인 나의 태도와 많이 비교되어 많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이제 또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마르틴 씨 가족을 보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다

프라하 2구역 1구역 6구역 돌아가면서 살았지만 교통도 제일 불편하고 약간은 외곽지대인 마르틴씨 댁에 살았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수국이 활짝 핀 동네 입구 작은 레스토랑에서 쓴 커피 한잔을 마시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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