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론& 리기산

알프스의 노래

by 박민희

마태 호른을 만난 우리는 다시 체르마트에서 테쉬로 돌아와 산악마을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다. 저녁은 체르마트에서 먹고 왔는지라 호텔에 온 우리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곤한 단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떠나야 하는 우리는 짐을 꾸릴 새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가 새벽 4시가 되어 일어나 짐을 챙기고 이른 조식을 먹고 새벽에 태쉬를 떠났다.


올 때의 아찔했던 창밖 풍경들을 생각하며 반대로 내려가는 좌석에 앉은 나는 한 시간 정도는 아예 먼 산만 보며 가까운 풍경은 보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은 아직도 동이 터지 않은 새벽이라 더 아슬아슬했다. 아마 이틀을 테쉬에서 자지 않았더라면 난 내려오는 버스에 타고 올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틀을 테쉬에서 자며 알프스의 봉우리 중 하나에 올라가서 마태 호른을 본 지라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서 담담히 버스에 올랐다


같이 여행하던 분들은 또 이른 새벽이라 잔다고 그 아슬아슬한 길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왔다. 나만 혼자 깨어 우리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기도하며 운전하는 폴란드 기사님을 응원했다. 한 시간쯤 아슬아슬한 산악 길을 다 내려온 버스는 드디어 다시 스위스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주며 평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난 잠깐 눈을 붙였다. 보이는 창밖 풍경들이 너무 예뻐 잠자던 다른 분들은 깨어서 감상하기 시작하는데 난 잠깐 단잠에 빠져 아름다운 스위스의 목가적인 풍경들을 많이 놓쳤다


3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루체른은 또 다른 새로운 알프스를 보여주었다. 2년 전에 취리히에 잠깐 왔을 때 그토록 보고 싶은 알프스가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루체른은 도시 전체가 알프스에 둘러싸여 있었다. 루체른 호수에서 목조 다리 카펠교도 걸어보고 카펠교 앞 호숫가를 따라 쭉 열린 장터에서 막 짜낸 사과주스도 사서 마셨다. 루체른 호숫가에서 바라보는 알프스는 하나의 화보집 같았다. 완만한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도시 전체를 빙 둘러싸고 있어서 어디에서 눈을 돌려 봐도 눈 덮인 알프스가 보였다. 아 정말 이 도시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도시의 풍요를 다 누리면서도 날마다 호숫가에 둘려있는 알프스를 볼 수 있다니....

체르마트에서 며칠을 보낼 뿐 아니라 이곳에 와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카펠교와 시가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리기산에 올라가기 전 우린 스위스에 온 후 처음으로 한식을 먹었다. 비싼 스위스 물가를 생각하면 한식을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날 우린 김치 된장찌개와 재육 볶음을 먹었다. 김치 된장찌개라고 한건 김치찌개도 아니고 된장찌개도 아닌 두부와 김치와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이었는데 일주일 동안 스위스 음식만 먹어 한국음식이 그리운 차에 먹게 되어 국적불명의 김치 된장찌개도 엄청 맛있었다. 제육볶음도 매콤하니 먹을 만해서 한국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 제육볶음을 그곳에서는 맛나게 먹었다. 사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삼겹살을 바짝 구운 것을 조금 먹기는 하는데 양념한 제육볶음은 잘 먹지 못하는데 스위스에서는 잘 먹었다.


음식 가격표를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스위스에서 왜 한식을 한 번밖에 안 주는지 이해도 되었다. 다들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우고 우린 루체른 시내에서 좀 더 자유 시간을 가진 뒤 루체른 호수로 유람선을 타러 갔다. 유람선을 타고 중간에 내려서 리기산으로 올라가는 등산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일행들은 모처럼 루체른에서 쇼핑도 하고 시내를 투어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번 스위스 여행을 하면서는 거리에 중국인이 거의 없었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관광지마다 휩쓸고 다니는데 이번 여행은 중국인이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올 때 코로나 때문에 공항이 한산했는데 유럽에 와서도 중국인이 없으니 조용하고 한산했다. 중국이 인구가 많긴 많은가 보다. 폴란드 기사님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오지 않아 당분간 일을 쉬어야 한다고 하셔서 마음이 아팠다. 바이러스로 사람들의 생계가 어려움을 겪을 줄 이곳에 와서 느꼈다. 중국의 그 많은 인구가 세계경제에도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폴란드 기사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으며 우린 루체른 호수로 향했다.

루체른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데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너무 차가워 밖에는 거의 나가보지 못했다.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림 같았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펼쳐져있고 배는 물결을 따라 우리를 신비한 풍경 속으로 이끌어 주었다. 2등석 칸이라 위층에 올라가지 못하고 배안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었는데 마시지 못했다. 내릴 때쯤 되어 올라가 보니 커피나 음료를 시키면 다 올라갈 수 있는데 우리가 잘 모르고 배 밑에만 앉아 있었다. 어이없는 웃음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우린 리기산으로 오르는 등산열차를 탔다.

고르너그라트로 올라가는 기차는 둥글게 완만하게 올라갔는데 의외로 리기산으로 올라가는 열차는 직선으로 계속 올라갔다. 프라하에서 빼뜨르진 전망대를 올라갈 때처럼 쭉 계속 올라갔다. 그래서 기차가 못 올라갈까 봐 혼자 힘을 다 주고 무게를 보탰더니 온 몸이 힘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치만 보고 있는데 참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올라 갈수록 펼쳐지는 알프스의 능선들과 목가적인 풍경들은 마태 호른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완만한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넓게 펼쳐져 끓임 없이 우리에게 그 품을 내어주었다


중간중간에 정말 하이디가 살았을법한 통나무 오두막집들이 곳곳에 있어 막 하이디가 뛰어나와 손 흔들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 알프스!! 며칠만 이곳에 머물고 싶다. 날마다 이산에 올라오고 싶다. 루체른 호수를 둘러싼 알프스를 계속 보여주며 기차는 드디어 종점에 다다랐다. 리기산! 왜 산의 여왕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마태 호른처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지 않지만 완만하게 펼쳐져 고른 능선과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싸고 있는 리기산 이 대자연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사진 찍기도 잠시 멈추고 난 앉아서 끝없이 펼쳐진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이 거대한 산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다만 숨 쉬고 바라보며 이 자연과 하나 되길 원한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이 우주를 만드신 그분을 생각한다.

스위스 여행을 계획하며 계속 조바심을 냈다. 코로나 때문에 하도 예민한 시국이어서 기침만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해서 평소 잘 먹지도 않는 건강식품까지 먹어가며 아프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스위스가 어지간히 오고 싶긴 했나 부다. 다른 때 유럽을 올 때면 잠깐 이웃집 오듯이 오가고 했는데 이번 스위스 여행은 비행기를 타기까지 또 프랑크푸르크 공항 입국이 통과될 때까지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첫날 도착한 날은 약간의 몸살기가 있어서 언니가 가져온 홍삼까지 얻어먹으며 몸을 달랬다. 다행히 푹 자고 나니 다시 쌩쌩해져 씩씩하게 여행을 잘 다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알프스를 원 없이 보고 지금 알프스의 품 안에 앉아 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겨울이 아니라면 이 산은 또 어떤 풍경일까? 높지 않고 아기자기한 이 산은 꽃피는 봄에 와도 좋을 것 같다. 푸르름이 가득한 알프스를 또 보고 싶다. 멀리 보이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들엔 이미 봄이 오고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골짜기 마마다 어김없이 호수와 마을이 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이곳에 와서 본 스위스의 아이들은 너무 예쁘고 인형 같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예쁘기보다 자연을 닮은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꾸미지 않고 주름도 민낯도 그대로 보이며 길 가 카페에 앉아 포도주나 차를 마시는 사람들..


리기산에서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보며 시간을 보낸 우리는 산악 역 근처의 카페에 자연스레 다 같이 모였다. 체르마트에서 산 초콜릿을 여기에서 먹었다. 시형이네랑 프린세스 가족과 몇몇 가까이에 게시던 분들과 6프랑 주고 산 초콜릿을 다 같이 나누어 먹었다. 산꼭대기에서 먹는 초콜릿은 많이 달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맛있었다. 초콜릿 한 봉지로 따뜻한 시간을 가진 우리는 드디어 내려가는 열차에 올라탔다.


내려가는 여정은 중간역에 내려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간다고 했다. 난 케이블카 타는 게 좀 무서워 그대로 기차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가이드는 이번 패키지여행 분들은 정말 날씨의 요정이 있는지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다 타고 너무나 선명한 리기산 정상도 다 보았으니 아마 사대가 덕을 쌓고 오신 게 틀림없다며 우릴 케이블카로 등 떠밀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며 바라보는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케이블카가 붕 올라갔다가 갑자기 하강하기를 두 번 하면서 비명과 함성 소리가 동시에 울려 나왔다. 난 눈을 감고 함성소리가 끝날 때까지 손을 꼭 모으고 있다가 살짝 실눈을 떠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아! 한쪽으론 알프스가 또 이편으론 스위스의 목가적인 마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호수를 빙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와 호수 건너편에 펼쳐져 있는 구릉지대와 마을들...

이걸 안 탔으면 결코 볼 수 없는 풍경들...

그래도 아마 혼자 와서 케이블카를 타라고 했으면 안 탈것 같다. 여럿이 같이 타니까 덩달아 타서 그 풍경을 오롯이 보고 왔다. 그래도 케이블카가 움직이는 동안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다 내려왔을 땐 다리가 풀려 휘청 휘청 했다. 산에서 내려오니 어느 세 어둠이 내려와 있다


언제 또다시 이 알프스를 와보나 아쉬움 마음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멀리 마을들엔 한집 두 집 불이 켜지고 밤하늘엔 어느 세 반짝반짝 작은 별들이 눈 덮인 알프스를 밝혀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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