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갯새암<<내 어머니의 샘>>

by 박민희


어릴 때의 나는 깡마른 체구에 키가 작은 아이였다. 그렇다고 아주 작은 건 아니고 60명 우리 반 애들 중에 중간 조금 못 되는 자리에 줄 서곤 하였다. 어릴 때 아버지는 언니와 나에게 시골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예쁜 원피스를 사다 주셔서 입히고는, 자전거 앞뒤에 태워 다니며 딸 자랑을 하시기도 하셨다. 언니는 공부를 아주 잘해서 늘 우등상을 타 왔고 아버지의 큰 자랑이었다.

나는 글짓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백일장이나 사생대회가 있으면 학교 대표로 나가곤 했지만 내가 받아 오는 상은 언니의 우등상만큼 아버지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방 안 가득 언니가 받아 온 우등상을 도배해 놓으셨고 친구 분들이 오시면 자랑스럽게 상장들을 보여 주시곤 했다. 난 한 번도 반에서 1등을 해 보지 못했을 뿐더러 전교 1등 같은 건 꿈도 꾸어 보지 않았다. 내가 받아 온 상은 개근상과 백일장이나 사생대회에서 받아 온 상장이 전부여서, 언니의 상장을 부러운 눈으로 보기도 했다. 언니는 키도 컸고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시골 촌에서 자란 아이답지 않게 피부도 뽀얘서 사람들이 서울 애라고 부르기도 했다.

언니는 공부를 워낙 잘해서 온 동네 아줌마들의 칭찬 대상이었고, 난 항상 공부 잘하는 애의 동생으로 불렸다. 당연히 집안의 모든 관심과 사랑은 언니에게 쏠려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언니와 나에게 판검사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글짓기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내게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매주 토요일이면 항상 아버지는 우리가 학교에서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공책 검사를 하셨고 노트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 그래서 토요일만 다가오면 난 항상 스트레스였고 어떨 땐 언니의 도움을 받아 노트 정리와 일기를 새로 쓰곤 했다. 매주 토요일 저녁, 노트 검사가 무사히 끝나야 우린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한번은 갑자기 전등이 나가서 아버지가 노트 검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전구를 새로 사 와서 갈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려, 아버지가 노트 검사를 못 하시고 바로 저녁을 먹게 되었다. 매주 하는 노트 검사가 내겐 상당히 고역이었기에 그날은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토요일 저녁마다 전기가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엄하시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또 참 다정한 면도 있어 체벌 후엔 맛있는 과자를 주기도 하시고, 때론 직접 부침개를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고구마나 감자, 깻잎 같은 야채를 밀가루에 반죽해서 부쳐주시곤 해서, 비가 오면 으레 아버지의 부침개를 기대하곤 했다. 난 키도 작고 평범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엄마는 이런 나를 항상 지지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받아 온 개근상도 아주 대단한 거라며 날 응원해 주셨다.


나는 어릴 때 유난히 약하고 골골거렸기에 엄마는 아픈 내가 한 번도 학교를 빠지지 않고 개근상을 받아 오는 것을 대견하게 여기셨다. 난 그래서 초등학교 때 내가 받은 개근상이 제일 좋은 것인 줄로 착각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졸업 때는 6년 개근상을 받아 와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드렸다. 우리 엄마는 이 상이 제일 좋은 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해 경북 도내 백일장에서 학교 대표로 내 글이 상을 받게 되었다. 제법 큰 상이어서 상장 수여식에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나를 데리고 시내에 있는 문화원에 데리고 가 주셨다. 학교 대표로 상장과 상품을 한 아름 받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갈 때는 교장 선생님께서 차비를 내주셔서 버스를 타고 함께 시내까지 갔는데, 상장 수여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차비가 없어 혼자 그 먼 길을 걸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십 리가 넘는 그 길을 혼자 털레털레 걸어서 우리 동네에 도착하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시내에서 시골 우리 동네까지 혼자 그 먼 길을 가방 메고 상장과 상품으로 받은 학용품을 한 아름 들고 걸어온지라 동네 어귀에 이르러서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동네 어귀 버스 정류장에 마을의 언니들과 친구 몇 명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평소에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언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언니들은 내가 우리 마을의 자랑이라며 서로 작은 돈을 모아 과자를 사서 축하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혼자 시내와 시골길을 몇 시간을 걸어와 힘들고 지쳤던 나는 그만 긴장이 풀리고 서럽기도 해서 왕 울어 버렸다. 언니들과 친구들은 내 가방과 상으로 받은 학용품들을 대신 들어 주면서 나를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우리 집 사랑방에는 언니들과 친구들이 사 놓은 과자랑 포도당 쫀드기가 지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내가 받아 온 상도 칭찬받을 때가 있다는 걸 놀라워했다. 밤늦게까지 언니들과 친구들과 함께 졸린 눈으로 과자를 먹으며 시내를 구경하며 걸어온 일들로 얘기꽃을 피웠다. 다음 날 엄마는 내가 받아 온 상을 언니의 우등상 옆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나를 몰래 뒤뜰로 불러 내가 제일 좋아하는 냄비라면을 혼자 다 먹으라고 주셨다. 삼대가 같이 사는 우리 집에서 나만 몰래 먹으라고 엄마가 라면을 끓여 주시니 꼭 생일날 같았다.


그때 시골 우리 동네에선 라면이 귀한 음식이라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꼬불꼬불한 라면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내 생일이 되면 라면을 끓여서 혼자 다 먹을 수 있게 해 주시곤 하셨다. 내가 너무 맛나게 먹으니 엄마는 “넌 이담에 크면 라면 공장 사장에게 시집 보내야겠다”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셨다. 키도 크고 예쁜 언니는 공부를 정말 잘해 아버지의 큰 기대를 받고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작고 평범했던 나는 엄마의 사랑과 돌봄 아래서 작은 문학소녀로 자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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