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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kman Jun 05. 2024

영어의 벽

들리는 것은 he, she and Obama 뿐

미국에 적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영어였다. 아무리 2년 동안 군대에서 밤에 연등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고 해도 생활에서 쓰이는 영어는 영어시험의 영어와는 달랐고 영어 공부는 영어시험을 위한 것이지 미국 생활을 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는 버지니아에 정착했다. 와이프가 버지니아에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고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영어와 별개로 또 하나의 장애물은 운전이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운전을 하지 않았고 미국에 오기 위해 급하게 운전면허를 땄기에 운전이 익숙지 않았고 미국에서 특히 버지니아 같은 외곽지역에서는 운전이 필수였다. 운전을 배우면서 National Public Radio (NPR)을 켜놓고 들었는데 보통 뉴스가 주로 나왔다. 처음엔 아무리 들어도 딱 세 단어만 들리는 것이었다: He, She 그리고 Obama. 그렇게 잘 들리진 않아도 차에 타면 자연스럽게 NPR을 들었고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들리는 단어가 많아지고 나중엔 내용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여정의 첫 관문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가지 옵션이 있었는데 하나는 한국에서 다녔던 대학의 학점을 가지고 4년제 대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을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옵션은 미국에서 대학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옵션을 위해선 좋은 토플 점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잘돼서 편입됐다고 쳐도 3학년으로 바로 편입해서 바로 의대에 진학하는 시험도 치러야 하고 내 영어 수준이 의대를 가거나 환자를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두 번째 옵션에 나와 같은 상황에 적합하게 미국엔 커뮤니티 칼리지라는 한 종류의 대학이 존재했다. 한국의 대학과 비교하자면 2년제 전문대이지만 미국에서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4년제 대학으로의 편입이 용이했다. 처음 커뮤니티 칼리지에 등록을 하니 커뮤니티 칼리지 자체 내에서 영어시험을 봐야 했다. 그 시험 결과에 따라 바로 대학수업을 듣지 못하고 ESL수업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고 특히 외국에서 막 건너온 경우에는 더욱 ESL 과정으로 쉽게 보낸다고 했다. 또한 학교 측에서는 외국인 학생이 ESL 과정을 듣는 게 더 이익이라서 그렇다는 소문도 있었다. 시험은 객관식 시험이었고 마지막에 논술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놀라운 시험 결과가 나왔다. ESL 수업을 듣지 않고 바로 대학과정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군대에서 2년 동안 한 ”영어공부“와 미국에서 온 후임에게 받았던 영어 일기 첨삭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 가 싶었다.


첫 학기에 들었던 수업들은 대학영어, 생물학, 일반 화학, 미국 역사 등의 과목을 들었던 것 같다. 보통 미국에서 Pre-Med는 전공이 아니었고 단순히 의대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학점이었고 그 외에는 어떤 전공을 하든 괜찮았다. 보통 대학영어, 물리, 화학, 생물, 유기화학을 각 과목마다 두 학기에 거쳐서 들어야 했기에 전공을 생물이나 화학 쪽으로 하는 게 용이했다. 나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과학을 전공으로 정했고 Pre-Med에 필요한 과목들을 듣기 시작했다. 첫 학기가 끝났고 받아 본 성적표는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아 4.0이라는 GPA를 받았고 아무리 영어가 부족해도 내 노력이 통하는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다녔던 버지니아의 커뮤니티 칼리지는 미국에서 2번째로 큰 커뮤니티 칼리지였고 버지니아에 있는 주립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좋은 성적 (GPA 3.75)를 유지하면 버지니아 주립대나 윌리엄 앤 메리라는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첫 학기의 성적을 받고 버지니아 주립대에서 대학을 다닐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공부와는 별개로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해야 했다. 당시에 와이프는 치과에서 Dental assistant로 일하면서 가계지출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지만 대학의 학비나 물가를 생각했을 때 경제활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한국 마트에 있는 벼룩시장의 구인구직란에서 일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고 식당의 문화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영어로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일식당은 한인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이었지만 워싱턴 DC 근교에 위치했고  손님들은 대부분 미국사람들이었다. 첫 출근을 앞두고 와이프에서 서버로서 일하기 위한 자세한 코칭을 받았다. 호스트가 처음에 손님을 자리에 앉히면 서버인 내가 가서 음료를 뭐를 시킬지 물어봐야 했고 “would you like to something to drink “라고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문장을 무한 반복하며 첫 출근을 했다.


그 식당의 셰프와 종업원들은 다 한국사람들이었다. 내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됐기에 사람들은 한국에서 내가 어디 대학에 다녔으며 미국에 오게 된 계기를 궁금해했다. 하루는 스시맨 형님과 대화를 나누다 그 형님이 내게 물었다. 미국에서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저는 미국에서 의사가 될 거예요. 그 얘기를 들은 그 형님의 표정과 대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거 불가능할 텐데 “  그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도 잘 못하고 이제 막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기 시작한 평범한 이민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게는 내 노력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이러한 자극은 내가 더 열심히 할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2년의 과정을 마쳤고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아 4.0 평점을 받았고 Summa Cum Laude라는 Honor를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편입 또한 잘 풀려서 버지니아 주립대와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의 합격을 받아서 들떠 있었는데 또 꿈을 꾸었다. 내가 중국의 신선들이 있을 법한 암벽을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올라갔더니 그 꼭대기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내게 누군가 두꺼운 책을 주면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고 와이프에게 얘기했다. 나 코넬대학교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아니나 다를까 며칠 지나지 않아 커뮤니티 칼리지 대학 카페테리아에 앉아있을 때 코넬대학교에서 합격 이메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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