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 가기
그냥 꽃이 있어서
작업실은 30년도 더 된 허름한 꽃집 옆에 있다. 골목 한 귀퉁이, 햇살이 닿으면 오래된 간판 위로 작은 그늘들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진다.
봄이면 꽃집은 몹시 요란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봄을 피워내기 때문이다. 골목은 아직 바람이 차가운데도 꽃집은 이미 봄을 건넌다. 봄보다 먼저 봄을 알아채는 건, 꽃이다. 이름도 모르는 꽃이 화분에서, 바구니에서 터질 듯 피어오른다.
하루 종일 작업실 안에 틀어박혀 자료를 찾고 글을 쓴다. 손목이 욱신거리고 허리도 무지근하다. 눈이 뻑뻑하고 어깨도 무너질 듯하다. 마주할 사람 하나 없는 공간이라는 게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귀가 먼저 문밖으로 나간다. 누군가 웃는 소리, 꽃잎 흔들리는 소리, 화분이 옮겨지는 기척… 슬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늘 꽃들이 핑곗거리다. 그냥, 꽃이 있어서.
어머니들은 꽃집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걸음을 멈추고, “예쁘다 예쁘다”를 연거푸 쏟아놓는다. 눈빛은 꽃잎에 붙들리고, 손은 어느새 지갑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그들 옆에서 종종 감탄을 거든다.
“이 꽃 좀 보세요. 이 빛깔 좀 보세요.” , “세상에~ 향기 좀 맡아보세요. 천리를 가겠어요.”
그러면 어머니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꽃값을 지불하고 꽃을 안고 떠나간다. 화분 하나가 흥정의 도구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순간이다.
오늘은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백발이 성성한 남자 어른이 꽃집 앞을 서성인다. 팔순은 훌쩍 넘은 듯한, 수다스럽지 않은 발걸음이다. 꽃을 앞에 두고 몇 번이고 망설이는 눈빛을 나는 놓치지 않는다.
“어르신, 꽃 참 예쁘지요?”
나는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제야 어른은 꽃대가 굵고 길게 올라온 화분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거 얼마요?”
“만원이에요.”
칠순을 바라보는 꽃집 주인의 상냥한 대답이 이어진다.
“좀 비싸네요…”
두 분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나는 틈을 비집고 한마디 얹는다.
“꽃이 피면, 아주 힘 있게 오래갈 것 같아요.”
어르신은 한참 말이 없다.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내가 웃으며 묻자 어른이 멋쩍게 말을 잇는다.
“우리 할머니가 꽃을 마이 좋아했어. 할마이는 죽고…”
괜히 말을 붙였나 싶다.
“쪼매 싸게 안 되겠어요?”
“천 원 빼 드릴게요.”
꽃집 주인의 말에 재킷 안쪽 깊은 주머니를 뒤적여 천천히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건넨다. 나는 조용히 덧붙인다.
“예쁘게 키우세요.”
아마릴리스 화분을 받아 든 어른이 환하게 웃는다.
“오늘이 혼례 기념일이라서…”
어른은 이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여태 잊지 않으시고…요.”
내가 어른과 대화하는 동안 꽃집 주인은 투명한 포장지에 프리지어 몇 대를 정성스레 싸 어른께 건넨다.
“할머니는 안 계셔도, 꽂아두세요. 향기 맡으시라고요.”
한 손에 아마릴리스 화분을, 다른 손엔 프리지어를 들고 천천히 골목을 걸어 나가는 어른의 뒤를 한참 바라본다. 백발이지만, 지팡이를 짚었지만 조금도 비틀거리거나 흔들림 없다. 고요히 걸어가는 발걸음엔 어떤 올곧음이 묻어있는 듯하다.
햇살이 골목을 따라 쏟아진다. 붉은 벽돌 틈에서 자란 제비꽃들이 어르신의 발치에 닿을 듯 피어 있고, 어르신이 든 화분 속 꽃잎이 햇살에 반짝인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돌아간다. 바람 한 줄기가 프리지어의 향을 내 쪽으로 밀어온다. 잠깐, 그 향기 속에 무언가가 겹쳐진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누군가의 젊은 시절 웃음인지.
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자주 굽었을 길이지만 매년 돌아온 봄이겠다. 잊고 살다가도 문득 그날이 어떤 날인지를 기억하는 이의 뒷모습은 다르다. 혼례 기념일. 오래전 그날을 여전히 품고 살아가는 어르신.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을 이제 홀로 걷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듯한 걸음이다.
꽃은 이제 더는 할머니의 손에 쥐어질 수 없지만, 어르신은 오늘도 어김없이 아내의 손에 꽃을 건넨다. 향기 맡아보라며 웃던 얼굴을,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던 표정을, 수줍게 손을 뻗던 손 끝을. 모두 잊지 않고 간직한 채.
문득, 어르신은 꽃을 산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산 게 아닐까 싶다. 함께였던 어떤 날을 오늘 안에 품기 위해.
낡은 골목, 오래된 꽃집 옆에 세 든 건 아직 글로 표현되지 못한 이야기들 속에 내가 들어가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말보다 글보다 오래 남는 시선, 향기보다 깊이 스미는 기억, 그리고 어르신의 표정까지 그렇게 봄은 오늘도, 누군가의 오래된 사랑을 다시 피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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