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내리며
스며든다는 것
비가 온다, 작업실 문을 열자 차가운 습기가 얼굴을 스친다. 7시 30분, 가장 먼저 서가(書家)에 갇힌 화분들을 문밖으로 내어놓는다. 빗물은 잎사귀마다 고요히 내려앉았다 이내 흙으로 스며든다. 스며든다는 건 서로 소리를 전제하지 않아서인지 더 깊은 여운을 준다. 말없이 적시는 빗방울들이 어느새 내 마음속 어지러운 먼지도 씻어낸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드립퍼 위로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붓는다. 커피 가루가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고, 서가 안은 금세 고소하고 그윽한 향으로 채워진다. 문득, 커피를 선물해 준 분이 생각난다. 내게 주려고 정성스레 고른 원두 봉지에 그의 미소가 서려 있다. 한 모금 마시려는데 커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언니도 생각난다. 쓴맛마저 껴안고 하루를 시작하던 사람.
드리퍼에 물을 붓고 있으니 잿빛 하늘 아래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친다. 비가 오는 아침은 이렇게 아무도 몰래 스며든 마음속 누군가를 조용히 데려온다.
나는 한 때 커피를 참 많이 마셨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커피에 기대어 살았다. 심한 스트레스는 원두 봉지에 코를 파묻는 걸로 풀었다. 하지만 의사는 내게 커피를 끊을 것을 처방했다. 심장 박동수가 급박하게 빨라지고 숨이 찼다. 가슴이 저려오는 불안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향에서 멀어졌다.
요즘, 아주 조금씩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아주 조심스럽게. 이제는 커피가 예전처럼 나를 흔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향이 마음을 덮고, 천천히 가라앉힌다. 아마도 내 안에 오랜 시간 끝에 도착한 안정이, 그렇게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커피 한 잔이 이렇게 부드럽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안녕~!” 사장님의 밝은 인사가 빗소리를 가르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온다. 이른 주문이 있다며 일찍 나오신 게다. 사장님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나는 아껴 두었던 제주 동백꽃 잎차를 꺼내 뜨거운 물을 부어 한 잔을 내어드린다. 사장님의 얼굴에 미소가 핀다. “어머! 무슨 향이 이렇게나 좋아요?” 삼십 년 넘게 혼자 꽃집을 지켜오신 분. 수많은 계절을 꽃과 함께 통과하고도 정작 본인은 종이컵에 대충 차 한 잔으로 끼니를 넘기시던 분. 그런 사장님이 내게 그러신다. 당신이 오고 나서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그 말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잃는다. 내가 내민 한 잔의 차, 누군가의 하루를 덥히고 있었다.
나는 원래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흙이 손에 묻는 것이 불편했고, 관심 주는 것도 귀찮았다. 물을 줄 때를 놓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사장님 곁에 머물며 꽃과 식물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그저 식물에 불과했던 존재들이, 이제는 나를 기다리는 얼굴이 되었다.
지금 내 서가엔 마흔 개가 넘는 화분이 있다. 책과 화분이 나란히 놓인 풍경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그 어떤 책보다도 나를 오래 읽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아침에 화분을 문밖에 내어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화분을 보며 말한다. “참 잘 키우시네요.” 나는 멋쩍은 듯 말한다. “꽃집 사장님이 다 키워 주는 거예요”
꽃집 사장님과 나는 서로에게 잘 스며들고 있다. 특별한 거래도, 멋진 말도, 거추장스러운 약속도 없지만 매일 아침 한 잔의 차와 함께 안부를 나누며, 그렇게 서로의 하루에 물들어간다.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게 닮아간다는 건 스며든다는 것이다. 빗물이 조용히 땅속으로 스며들 듯, 누군가의 마음과 내 삶이 서로 잔잔하게 번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