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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Jul 21. 2022

낯선 긴자, 아는 이름


‘긴자에서 긴장이 되는 건 당연해. 괜찮아, 여행은 원래 낯선 걸 해보는 거니까.’


번쩍번쩍 새로이 문을 연 쇼핑몰 게이트에서 퍼스널 쇼퍼를 기다리고 있었다. 퍼스널 쇼퍼라니. 퍼스널 쇼핑이건 퍼블릭 쇼핑이건 쇼핑이라면 몸이 녹아 없어지는 듯 싫어하는데 말이다. 저렴한 비행기표가 나왔다며 아이들을 보고 있을테니 놀고 와보라는 배우자 말에 느닷없이 홀로 도쿄에 온 것이다. 도서관에서 급히 빌려온 여행책 내용 절반은 쇼핑 안내였다. 긴자가 유명하다는데, 평소대로라면 가게 앞에서 쭈뼛거리다가 편의점 호로요이나 사서 숙소로 돌아올 것 같았다. 멍석을 깔아줘도 못 놀까 은근 조바심이 났다. 여행은 새로운 걸 경험하라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못하면 남의 기운이라도 빌려볼까. 에어비앤비를 뒤져 체험 여행을 찾았다.


‘퍼스널 쇼퍼와 함께하는 도쿄 쇼핑 투어’

이거다! 명품 매장에서 수많은 손님을 상대해 온 이가 다양한 패션 스타일과 특별한 로컬 브랜드를 소개해 준단다. 쇼핑 어지럼증 때문에 지천에 널린 가게들을 피로하게 지나쳐만 가는 소외감을 떨치고 싶었다. 긴자에 밝은 안내자가 있으면 소모한 시간과 비용에 알맞는 좋은 물건을 들고 돌아갈 수 있겠지. 눈 딱 감고 글로벌 여행객 사이로 뛰어들어 보자. 영화에나 나오는 쇼퍼의 도움을 받아보자.


맨하탄에서 왔다는 모녀, 그리고 네델란드 청년과 오늘의 호스트 히로를 만났다. 그는 우리를 이끌고 거대한 쇼핑몰의 몇 개 층은 건너뛰고 수십 개의 가게 사이 한두 곳만 골라 멈추었다. ‘그래, 바로 이런 걸 원했어.’ 빠른 이동이 만족스러웠다. 멈추는 곳마다 브랜드의 특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일본 면화 산업의, 일본 청바지 염색 기술의, 일본 한정판 디자인의, 일본 장인정신 품질의 소개가 이어졌다. ‘강매도 하지 않고 아주 좋아. 일본 데님이 특별한 건 처음 알았네.’ 소소한 정보들이 채워지니 아직은 몸도 녹아 내리지 않고 괜찮았다. 맨하탄 모녀는 명품 편집샵에서, 네델란드 청년은 아방가르드한 신진 디자이너 가게에서 옷을 골랐다. 명품은 미취학 어린이와 놀이터로 출근하는 내 일과에 가당치 않았고 아방가르드 옷은 정말이지 아방가르드 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내가 무료해 보였던지 히로가 다가와 물었다(둘 다 제 2외국어로 간신히 소통했으므로 존대어를 생략한다).


“너는 뭘 사고 싶어?”

“검정 운동화랑 남편 줄 하얀 티셔츠”

“음 정말 좋은 운동화가 있어. 바로 이거야. 일본에선 아주 오래된 브랜드지.”

“얼마야?”

“60만원.”

“헉!”

“절대 안 뜯어져.”

히로는 60만원 짜리 운동화를 집어 들고 자신을 믿으라는 듯 꽈배기 마냥 이리저리 비틀어 댔다. 그러다 뜯어져서 진짜 사야 하면 어쩌려구! 그의 말을 믿는다 해도 고무신에서 조금 발전한 검정 운동화의 지나친 가격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비싸(어서 내려놔).”

일행은 마지막으로 사시사철 휴가지 룩을 언제나 살 수 있다는 재미난 가게에 들렸다. 마지막이니만큼 쇼핑 리스트에 있는 남편 선물은 해결하면 좋겠다.

“히로, 남편 옷 고르는 것 좀 도와줄래?”

“어떤 스타일인데?”

“단정하고 그냥 하얀 티를 좋아해.”

“이건 어때?”

“너무 큰데.”

“체격이 어때?”

“너랑 비슷해.”

이건 어때?”

휴양지 패션이라 그런지, 옷들이 유독 파자마처럼 헐렁한 실루엣이었다.

“음, 나는 히로 너가 지금 입은 게 딱 좋아. 그건 어디서 샀어?”

자신의 스타일을 콕 집어 좋다 말해서인가, 그는 두 손 가득 들었던 옷들을 매대에 내려놓더니 천연 어깨뽕을 살리는 자세로 상체를 움칫움칫 돌려가며 말했다.

“유니클로”


히로 덕분에 긴자의 쇼윈도 앞에서 쭈뼛거리지도 않고, 일본 패션 브랜드에 대해서도 배우고, 외롭지도 않게 구경을 마쳤다. 그리고 호로요이 하나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긴자에서 퍼스널 쇼퍼를 만나서 일본 패션 브랜드에 대해서 배웠어. 당신 선물을 사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유니클로래. 그래서 이번에도 아무것도 못 샀어.”

호로요이는 달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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