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기억
새벽 백열등 불빛 아래 지내는 특별한 의식 같던 학교 소풍 김밥 싸기가 어느 해엔가 위기를 맞았다. 엄마가 타격을 입은 듯한 목소리로 "민지네에 가면 김밥을 싸준다더라." 말하면서다.
민지는 내 친구가 아니다. 김밥을 만들어 파는 가게 이름이다. 민지라는 딸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이 내 엄마의 김밥 부심을 흔들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간 김밥집에서 민지 엄마와 동료들, 그러니까 그 또한 엄마일 사람들이 일사불란한 분업으로 주문을 받는 족족 말고 썰어 포장해 내는 장면을 엄마는 목격했다. 두툼하게 부친 지단도 들어가고 우엉도 듬뿍이고 몸에 좋으라는 시금치도 물론 들었고, 맛의 하이라이트가 햄인지 맛살인지 고기인지도 선택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엄마는 자신의 김밥을 '나니까 이렇게 한다'고 여길 수 없게 되었다. 1박 2일 걸리는 김밥 싸기는 추억에 젖고 보람에 겨워서, 비록 엊그제 나를 몽둥이질로 잡았더라도 오늘은 자식 기르는 사람의 마음으로 정화되고 고양되게 해주었을텐데. 그런데 그 일이 시장통에 놓이고 보니 재료값도 안되는 고작 2천 원인데다 심지어 5분이면 끝나는 노동이었다. 엄마는 민지네 김밥을 보기만 하다 사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소풍이 며칠 안 남았는데 김밥을 싸 준다는 건지, 사 준다는 건지 정하지를 못하고 혼잣말을 흘렸다.
"거기 가면 다 있던데..."
"세상에, 전화 한 통이면 김밥이 생기다니.“
그 무렵 나의 키는 엄마보다 웃자랐고, 엄마의 손가락 마디는 굵어져서 반지를 돌려 빼는 일이 흔했다. 민지네 김밥 한 줄에 자식 키우는 일의 추억과 정성이 소환되었을 엄마가 마음을 정해 놓고 말했다.
"아침에 학교 가다가 민지네 가서 한 줄 사가라."
그 후로, 날이 밝기도 전에 부스스한 몰골로 부엌 바닥에 앉아 엄마가 썰어낸 김밥을 낼름 받아먹던 일은 집에서 사라졌다.
1993년 9월 27일 조선일보 14면
창업스쿨 성공담 '김밥 전문점'
"애들이 웬만큼 크고 나니 전업주부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관심을 갖고 김밥을 즐겨 싸오던 터라 김밥을 전문화시키면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다. 지난해 처음 가게를 낼때에는 대여섯 가지로 출발했다가 지금은 김밥만 해도 10가지를 훨씬 넘는다. 모두 내가 개발해 낸 작품들이다.
김치김밥으로부터 달걀, 어묵, 햄, 맛살, 콩나물, 참치, 치즈김밥 등 무척 다양하다. 일반 분식가게에서 파는 김밥과 차별화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나이 드신 어른들 입맛에 맞도록 유부김밥도 개발했고, 어린이를 위해서 오색꼬마김밥도 내놓았다. 햄, 맛살, 시금치, 당근, 달걀 등 다섯 가지 재료를 넣어 애들이 좋아하도록 색깔도 예쁘게 하고 크기도 작게 만들었다.
(중략)
우리 가게 김밥이 인기를 누리는 비결은 완전히 가정식이라는 데 있다. 일손이 많이 가는 업종이기는 하지만 여자의 부업으로서는 수입이 괜찮은 편이다. 자본금도 많이 필요하지 않다. 13평짜리 점포를 얻는데 권리금과 보증금으로 2천2백만원이 들어갔고 월세로 35만원이 나간다. 테이블 3개와 의자 12개, 그리고 주방설비에 6백만원쯤이 들었다. 그뿐이다. 장소선택도 고민거리가 아니라고 본다. 아파트단지나 사무실지역 모두 괜찮다."
1992년에는 김가네가, 1994년에는 종로김밥이 문을 열었고 둘은 96년에 프랜차이즈로 사업화했다. 김밥을 사서 먹는 기록은 1945년 해방 무렵부터 남아있다. 강제징용에서 도망친 이가 김밥을 사서 끼니를 때웠다 하고, 1949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해방 이후 늘어난 여객열차에서 떡, 계란 등과 함께 김밥을 파는 장사꾼들을 다루었다.
※참고자료 <한식문화사전>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