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 디렉터스 컷> 리뷰

이야기가 저주가 되지 않도록

by ironiist

* 이 글에는 영화 <더 폴 : 디렉터스 컷>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색약입니다(이렇게 안 궁금할 수가!라는 탄식이 들리는 듯합니다). 정밀 검진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학창 시절 신체검사를 하면 늘 같은 판정을 받아왔다. 알록달록한 동그라미 속에 갇혀있는 숫자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쩔쩔매는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자신의 소임을 마침내 해냈다는 성취감에 사로잡혀) 더 많은 검사지를 펼쳐 보이던(덕분에 나는 환공포증까지 얻었다) 선생님들의 일치된 결론이었다.


그 소식은 마침 지루함에 허덕이던 아이들에게 신선한 먹잇감이었다. 내가 색약 검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그 짧은 거리에서 그들은 나의 눈앞에 색이란 색은 다 들이대며 맞춰보라고 문제를 내곤 했다. 상처랄 것 까지는 없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볼에 열이 오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색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 때부터 색칠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하나의 변명거리에 불과하지만, '나는 색에 약하다'라는 열등감이 신체검사 때마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역시 공개된 장소에서의 신체검사는 어느 모로 보나 추억거리조차 못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다다'를 그릴 때도 채색하는 단계에 이르면 스스로 쪼그라드는 것이 느껴진다. 달라진 점은 색에 대한 욕구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매혹적인, 적절한 색을 구현해 낸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 마음 어딘가에 늘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더 폴 : 디렉터스 컷>도 그런 이유로 보게 된 영화이다. 난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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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폴 : 디렉터스 컷>


1920년대 할리우드. 오렌지를 따다가 떨어져 쇄골이 부러진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다. 비록 상체는 깁스를 했지만 다리는 자유롭기에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던 알렉산드리아는 어느 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간호사 에블린(저스틴 와델)에게 편지를 적어 던진다. 하지만 편지는 에블린에게 닿지 못하고 다리를 다쳐 입원 중인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에게 떨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읽고 있는 로이를 알렉산드리아가 발견하며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영화 촬영 중 사고로 다리를 잃고 사랑도 잃은 로이는 절망적인 삶을 끝내기 위해 이 만남을 이용한다. 그의 목적은 병원에 있는 다량의 모르핀을 알렉산드리아에게 가져오라고 시키고 그것을 복용하는 것. 하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쉽사리 움직여줄 리가 없다. 로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소녀를 종용하기 위해 환상적인 '복수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만든 이야기는 다섯 살 소녀의 마음을 빼앗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도 사로잡을 만한 아주 멋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절망에 빠진 로이의 삶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출구를 잃어버린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위는 모르핀을 손에 넣기 위한 교묘한 책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가깝다(그런 점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의 말대로 그를 구원하기 위해 온 사람이다). 이 이야기의 성패가 곧 로이의 삶의 성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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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자들의 이야기'가 끝에 다다르자 여전히 삶에 비관적인 로이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을 하나씩 죽음에 이르게 한다. 듣고 있던 알렉산드리아가 울면서 그를 만류하지만 로이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 위대한 복수자들의 이야기는 잔혹한 죽음만이 나열된 삶에 대한 저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며 알렉산드리아가 들으려던 것이 아니다. 주인공 블랙밴디트의 죽음으로 저주가 완성되기 직전, 알렉산드리아는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원칙으로 로이를 일깨운다.


"Let him live."


이 원칙을 받아들인 덕분에 로이의 이야기는 저주가 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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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더러는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내 삶 역시 절망적일 정도로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이 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실을 하나만 더 알려드리자면), 그것들 때문에 '살기 싫다'는 말을 가끔 내뱉고는 한다(더 가끔은 블랙밴디트처럼 중지를 검지 위에 올려놓은 채).


하지만 이 불만족스러운 삶을 내가 주인공인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본다면, 그렇게 시선을 전환한다면, 조금은 안도하게 된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류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색약을 이겨낸 만화가의 이야기'... 이런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도대체 짐작조차 할 수 없고 긴장감은 당최 끊기지 않는 데다가 주인공마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그래서 삶과 가장 닮아있는 이야기들을 나는 좋아한다.


우리는 삶을 살고 있기도 하지만 삶이라는 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한 것이다. 내 상상 속에서 이 둘은 아주 가까워 하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분리되어 있다. 둘 사이에 성체(聖體)처럼 얇은 틈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사는 중간중간 이야기가 잘 써지고 있나 확인해야 한다. 삶에 매몰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이야기의 차원에서는 보이기 때문이다. 로이의 경우처럼 이야기가 삶을 구원할 수도 있다(역으로도 가능하다). 누군가는 '사는 것만으로도 바쁜 데 이야기 쓰는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 하나의 원칙만 존재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 그 원칙만 잘 지키면 이야기는 저절로 써진다. 우리는 그저 삶과 이야기를 오고 가면 된다. 그 원칙은 이미 언급한(이 방면에서는 로버트 맥키나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훌륭한) 알렉산드리아가 세운 단 하나의 원칙이다.


'절대 주인공을 죽이지 말 것.'


이 원칙을 어긴다면 나의 이야기는 저주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원칙이 내가 <더 폴 : 디렉터스 컷>에서 얻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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