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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Mar 27. 2022

오타쿠에게 귀를 기울이면_2

2022.3.18.금.


스튜디오 지브리의 1995년 작품. <귀를 기울이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 꼽아보자.


첫 장면인 아파트 단지의 여름밤 풍경.

여름 오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개사해서 부르는 시즈쿠.

도서관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탄 시즈쿠와 고양이(세이지는 문이라고 부른다)의 조우.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듯 하염없이 계단을 내려오는 시즈쿠.

갑자기 반짝하고 빛나는 바론 남작의 눈.

드워프와 엘프의 슬픈 사랑이 박제된 벽시계.


쓰다보니 이 애니메이션은 하나만 꼽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마음으로 지지하는 장면은 있다. 스기무라가 시즈쿠에게 차이는...아니 시즈쿠가 스기무라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장면.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장면 이후 스기무라의 작품 내 비중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역시 고백은 단순히 고백이 아니다. 성공여부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에서 빠져줘야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게 고백의 잔인한 룰이다). 무엇보다 일본의 여름이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애니메이션 중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귀를 기울이면>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풋풋하고 아름답고 생명 충만한 성하(盛夏)'에 가깝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을 들여 가만히 이 애니메이션을 되짚어보면 그렇게 감상을 마무리 짓기에는 어딘가 찜찜하다. 특히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보는 사람들을 모두 섬뜩하게 하는 한 컷이 있다. '그 시절 우리들의 성장담'이라는 십자평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시절의 절박함이 이 한 컷에 담겨져 있다.


방구석에서 다음 목표를 오타쿠로 정한 나는(지난 글 참조) 고등학교에 진학한다(오타쿠의 꿈을 품은 고등학생이라니...정말 피하고 싶은 신입생이다). 당시 우리 학교는 토요일에 격주로 CA(Club Activity)를 진행했다. 이 날은 사복을 입고 다른 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클럽 신청서를 제출하는 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친구들과 한 클럽에 모일지 모두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자신있게 빈칸을 채워넣었다. '애니메이션반'.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건 삶을 과감하고 단순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준다. 그때 나는 굉장히 심한 사춘기를 겪고 있었기에 어딜가든 친구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는데 이때는 혼자여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애니메이션반'을 선택했다. 그만큼 진심이었다고 할까.


그리고 CA 첫날. 역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는 2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교실의 분위기를 살폈다(이 장면에 말풍선을 넣을 수 있다면 '이거이거...기껏해야 딜레탕트들뿐이군. 나는 오타쿠란 말이다' 라는 방백이 적절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선생님은 예상외로(어쩌면 예상대로)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선생님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 인문계 학교에서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교장과 싸우며 애니메이션 클럽 개설을 관철시켰을게 뻔한(제 멋대로의 상상입니다만) 저 남자야말로 '진정한 오타쿠'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남자는 간단한 활동 소개와 함께 첫 시간이니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앞자리에 앉아 있던 3학년 선배에게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라고 하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는 사실 두 시간 정도 자신은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클럽을 만든 것 뿐이었다.

3학년 선배(진짜 오타쿠는 이 사람이었다. 수험생이 애니메이션반이라니)는 주섬주섬 집에서 가져온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 교실 앞 커다란 티비에 재생시켰다. 담당 교사에 대한 나의 실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면에서는 지브리의 시그니처 인트로인 파란색 화면과 토토로의 뚱한 얼굴이 나왔고 이내 'Country road take me home'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귀를 기울이면>에서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장면은 시즈쿠의 꿈 속에서 등장한다. 두 달 안에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창작에 매진하던 시즈쿠는 깜빡 잠이 든다. 꿈 속에서 바론의 목소리를 따라 원석을 찾아 헤메는 시즈쿠. 이내 어떤 동굴에 다다르고 그 곳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돌 하나를 집어 두 손에서 가만히 펼쳐본다.

그러자 돌은 이내 빛을 잃고 잿빛의 죽은 새끼 새로 변한다.


그날 CA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네이비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나름 멋을 부렸습니다) 애니메이션이 끝나면 딱히 할 것이 없는 클럽 특성상 학교에서 제일 빨리 교문을 나섰던 기억도 있다. 마침 화창하기 그지 없는 봄이었다. 주 5일제인 지금, 가끔 그립기도 한 예의 그 '완벽한 토요일'이었다. 정문 앞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역시 애니메이션반에 가입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구하기 힘든 지브리의 명작 애니메이션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다니(<귀를 기울이면>은 『아니메를 이끄는 7인의 사무라이』에서도 아주 짧게 언급된 정도였기 때문에 이 작품을 만난 것은 기대 밖의 일이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내가 좋아하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며 <귀를 기울이면>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죽은 새끼 새의 장면은 넣지 않는 게 좋았겠다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에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장면.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 계속 생각나는 건 그 앙상한 새끼 새의 모습이었다.

나이를 제법 먹은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을 '오타쿠' 운운하며 지금 이렇게 가볍게 추억하고 있지만 사실 그때는 절박했었다. 학업을 접고 이제라도 애니메이션의 길로 진로를 정해야할지 그렇다면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해야할지 그리고 본격적인 준비를 하려면 어디서 조언과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 중에서


그때 『데미안』을 읽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라는 감각은 어렴풋이 있었다. 동시에 여기에서 멈춘다면 나는 지금의 세계에 갇히고 말겠구나하는 감각도 갖고 있었다. 알을 깨지 못하고 죽은 새끼 새처럼. 돌아오는 버스 내내 그 장면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 였을 것이다.


이후 나는 용기를 내서 부모님께 속내를 말씀드리고 사촌누나의 소개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 누나와 진로 상담 같은 것을 하기도 했다. 그때 막 국내에서 발간을 시작한 <뉴타입>이라는 애니메이션 잡지를 모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다시 수능 공부로 돌아왔다. 이유는 한가지. '지금은 여기까지 한 것만으로도 좋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용기를 내고 이런저런 길을 모색해 봤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조금 싱거울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아직은 부화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알을 깨는 것 못지 않게 알을 언제 깨는지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사람마다 다르다. 모두가 같은 시기에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면 그건 역시 너무 잔인하다. 언제 나와야 하는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그 뒤로 긴 시간을 지나 나는 이제야 알을 깨고 나올 시간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서툴지만 내 콘텐츠를 쌓아 가고 있는 것이다. 오타쿠를 꿈꾸던 고등학생이 잠시 숨고르기를 택한 것이 잘한 일인지는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지는 더 날카롭게 부리를 벼려서 있는 힘껏 껍질을 쪼아댈 수밖에.


- 요즘 듣고 있는 음악 : Jams Blake

- 요즘 마시고 있는 것 : 내자동 커피

- 요즘 읽고 있는 것 : 산책자(로베르트 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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