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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Jun 07. 2024

진짜 똑똑하다, 용녀

<아키라> 그리고 <바다가 들린다>

2024. 5. 27.


  어쩌다가 본가에 가서 혼자 남아있게 되었다. 가족들은 다 함께 산책을 가고 피곤함을 핑계로 나만 남은 것인데, 적막한 집에 누워있자니 오래된 안락함이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각자의 가정을 이룬 자식들이 떠난 뒤에도 부모님께서 이 아파트에 쭉 사신 덕분에 가끔씩 이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셈인데, 이제 두 분께서 집을 정리하고 좀 더 작은 집으로 옮기신다고 하니 두 분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 혹은 10시에 수업을 듣는 전혀 대학생스럽지 않은 시간표를 짰다. 덕분에 이른 오후에 집에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그 시간에 어머니는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시장에 가 계신 적이 많았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면 대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거실 소파에 해 질 녘까지 누워 있곤 했다. 그러다 얕은 잠에 빠지면 그보다 좋은 날은 없었던 것 같다(그러고나서 저녁에 술 마시러 다시 학교에 가는 이상한 대학생이었다).

집에서 찍은 사진은 아닙니다만.

  오랜만에 혼자 소파에 누워보니, 그 쿠션감은 예전만 못하고 가죽도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다. 너도 나이가 드는구나. 긴 세월 함께한 반려견의 등을 쓰다듬듯 거칠어진 그 가죽을 만져보다가 불쑥 이 집에 남아있는 내 흔적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던 방은 손주들(소파의 노화를 부추긴 귀여운 주범들이다)을 위해 부모님이 구입한 장난감들에게 점령된 지 오래지만 뭐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시는 그분들의 성격을 볼 때 내 물건들 중 일부는 아직 살아남아 있을 터였다. 부모님의 이사 전에 내 짐들을 추려내는 작업을 할 필요도 있었다.


  방에는 역시 내가 그 시절 아끼던 물건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책상 서랍에는 음악 CD, 카세트 플레이어, LP, DVD 같은 것들이 생존(?) 해 있었고 서가와 벽 틈 사이에 커다란 영화 포스터들이 숨어있었다. 서가에는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었는데 그 시절의 나는 책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대부분 강의 교재와 만화책들이었다. 지금 사는 집으로 가져갈만한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던 중 책들 사이에 플라스틱 케이스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AKIRA> 그리고 <海がきこえる(바다가 들린다)>의 비디오테이프였다.

  이 전의 글에서 썼듯이 나는 고등학교 때 재패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었다. <AKIRA>의 비디오테이프는 그때 용돈을 모아서 산 것이다. 아마도 '모든 애니메이션 명작을 섭렵하겠다'라는 허세로 이 작품을 구입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아기공룡 둘리>를 만들 때 일본에서는 이런 애니를 제작했다는 사실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아기공룡 둘리>도 물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만화영화가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확신을 이 작품을 통해 갖게 되었다.


  함께 꽂혀 있는 <바다가 들린다>는 같은 반 친구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다(생일선물로 이런 걸 주고받다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시에 나는 조금 실망했던 것 같은데 처음 들어본 작품인데다가 이왕 지브리를 줄 것이라면 좀 더 대표작을 주길 바랐던 것 같다(<바다가 들린다>는 미야자키 하야오나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도 아니다). 하지만 실망은 아주 조금이고, 정말로 기뻤던 것도 기억난다. 이 녀석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이야 하는 마음에. 


  그 친구는 똑똑했고 공부도 잘했고 잘 놀았다. 성격도 활발해서 선생님 포함 대부분의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수다스러웠다. 당시 방영하던 <순풍산부인과>의 선우용녀만큼 수다스러워서 '용녀'라는 별명을 가졌었다(적절하게도 그 친구의 이름에 '용'이 들어갔다). 나는 그 친구와 직접적으로 친하지는 않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에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었던 것 같다. 


  <바다가 들린다> 케이스를 열어보니 그가 나에게 써 준 작은 편지가 테이프와 함께 들어있었다. '맞다, 이런 것도 쓰는 세심한 녀석이었지' 하며 읽어보니(그답게 손바닥만 한 종이에 많은 말을 정말 빼곡히도 써놓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그 친구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 마음이란 '내가 너보다 더 오타쿠다, 까불지 마라'라는 것과 '너랑 좀 더 친해지고 싶다'라는 것.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나는 그 마음들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고 결국 학년이 올라가며 그 친구와는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바다가 들린다>는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따로 글을 써야 할 정도이니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멋있어여 라니, 우엌.

  비디오플레이어를 구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워서 앞으로도 이 테이프들을 재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테이프가 담긴 네모난 케이스를 보고 있으면 내 머릿속에서 애니메이터의 꿈을 꾸던 그 시절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고등학교 졸업앨범도 못하는 일이다. 방 안을 샅샅이 뒤지며 한참 동안 무엇을 가져갈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 비디오테이프 두 개만 집으로 가져왔다. 덕분에 나는 그 시절을 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선물은 그 기능을 할 수 없음에도 이렇게 생명력을 지니기도 하나보다. 그것도 아주 길게. 혹시 이 미래를 알고 나에게 선물과 편지를 준건가. 그렇다면 진짜 똑똑하다 너, 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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