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시대의 카피라이터

핵심만 빠르게

by 일조

기술이 사람보다 빠른 시대다. 인간의 뇌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천천히 진화해 왔다. 적인가 아군인가, 먹을 수 있는 존재인가, 내가 먹힐 것 같은 존재인가를 파악하는 파충류의 뇌에서부터 이 녀석이 내가 젖을 물릴 자식인가, 눈앞에 이 상대가 같이 자식을 키워 줄 수 있는 상대인가를 판단하는 포유류의 뇌까지 인간은 매우, 매우 천천히 진화해 왔다. 정보의 빅뱅 이후 인간의 뇌는 과부하가 심하게 걸린 것 같다. 이건 나를 보면 매우 분명하다. 하루에 접하는 정보의 양이 스마트폰을 처음 접한 때와 비교해 보면 비교도 되지 않는다. 봐야 할 게 너무 많아진 나머지 구체적인 내용을 보지 않게 됐다. 무슨 얘기인지만 휙 보고 넘어가는 지경이 된 것이다. 기사를 볼 때 헤드라인 모음으로 본다. 실시간 검색어 차트로 트렌드를 본다. 유튜브를 볼 때 영상 타임 라인을 보고 내가 원하는 정보가 있을 것 같은 구간만 보고 넘긴다. 영화도 요약 영상을 본다. 자, 스마트폰을 많이 안 쓴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렇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생활에 더 밀착된 분들은 더 심하겠지. 이런 시기에 내가 15초, 30초, 1분, 3분 광고를 하고 카피를 써야 한다. 시대가 나를 안 도와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왜냐면 나는 서설이 긴 타입이기 때문이다. 배경 설명부터 쫘악해서 분위기를 흠뻑 적시고 난 후 심경을 일층, 이층, 삼층까지 묘사하고 상품을 팔아야 하는 스타일이다. 지금 시대는 그런 시간을 절대, 네버에버 용납하지 않는 시대이다. 핵심만 빠르게. 나한테 핵심은 천천히 드러나야 제 맛인데 그것부터 보여달라 한다. 그래서 요즘 더 헤드라인 카피가 소중해졌다. 나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시려면, 첫 문장과 이어지는 두 세 문장에서 그들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연설로 치면 처음 30초 인 것이다. 하품을 하고 있는 청중들을 사로잡을 서너 문장, 나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한 청중들조차 내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처음 1분의 연설. 그런 연설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요즘은 헤드라인을 고민한다. 썸네일 카피를 고민한다. TVCM의 첫 씬을 고민한다. 처음 카피를 배울 때와 스토리 아크가 달라진 것을 너무나도 실감한다.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중요하고 핵심이지만 아크를 어떻게 짜느냐에 대한 구성론은 새로 정립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것저것 계속 실험해 보면서 고객들 반응을 보고 더 나은 쪽으로 개선시키고자 하는 것이 내 방향이다. 저스트 테스트 앤 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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