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크리스마스 캐럴 4.

그 시절, 디아파송을 기억하시나요?

by XandO

중고등학교 시절이던 1980년대,

음악 감상은 대부분 라디오 또는 LP와 카세트테이프가 주류였다.

당시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문화예술계는 사전 검열이 매우 심했고,

국내 라이선스 음반은 발매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어렵게 나온 음반들도 핵심 곡이 빠지거나,

예전 음반에서 곡을 편집한 구성으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재킷 디자인도 원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음악에 관심이 많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로 세운상가의 이른바 ‘빽판’ 가게를 찾았다.

정식 라이선스 음반이 2,500원에서 3,000원 하던 시절,

500원만 내면 방송금지곡을 포함한 해외 최신 히트곡을 접할 수 있었다.

조악한 재킷과 음질은 감수해야 했지만,

새로운 음악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

그 불편함도 감사함과 바꾸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불법 복제 단속과 처벌이 강화됐고,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문을 열면서

세운상가의 상권은 빠르게 쇠락했다.

이어 1990년대 초반 CD가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했고,

1992년 무렵에는 LP와 CD 판매량이 비슷해졌다는 통계도 남아 있다.


그 무렵,

나는 그 전설의 ‘디아파송’을 만나게 된다.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길가에 있던 그 레코드 숍은

문 밖에서 보기에도 분위기가 남달랐다.

음악 감상실이 아님에도 공간 안쪽은 고상하고 아늑했다.

진열대가 양쪽 벽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고

처음 듣는 세련된 음악들이 매장 안을 가득 메웠다.

다른 국내 매장들이 대부분 라이선스 음반을 팔던 시점에

디아파송은 해외 원반을 직수입했다.

라이선스 음반들에 비해 비싼 가격이었지만

음악을 찾아 듣고 싶은 사람들,

특히 재즈, 클래식, 샹송을 찾는 이들의 작은 음악 성지였다.

나도 어설프게나마 그 무리에 발을 담갔던 거 같다.


White Christmas - Lee Ritenour


당시, 내게 그 진열대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레이블이 GRP였다.

GRP는 1978년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과

프로듀서 래리 로젠(Larry Rosen)이 설립한 재즈 레이블이다.

디지털 녹음 기술과 현대적이고 팝적인 감각을 활용한

퓨전 재즈, 스무스 재즈 계열의 사운드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비밥이나 클래식 재즈에 익숙했던 이들에게는 생소했지만

당시의 내겐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재즈를 접할 수 있는 기가 막힌 창구였다.

기타리스트 리 리트너 ( 리 릿나워라는 요새 발음이 어색한 옛날 사람이다 )의 앨범을 비롯해

GRP 특유의 세련되고 윤기 흐르는 사운드는 젊은 세대의 감각과 잘 맞았다.

1988년 발매된 GRP 크리스마스 컬렉션 1집을 시작으로

1991년 2집, 1993년 3집이 이어졌고,

이 시리즈는 그 시절 디아파송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1994년 여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곳을 꽤나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2000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방문했을 때

그 디아파송은 그 자리에 없었다.

IMF 이후 여러 사정으로 운영이 어려워져 명동을 떠났고,

이후 음악감상실이나 와인바 형태로 이어지다가

2014년에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학을 떠나던 당시엔 짐을 줄이기 위해

CD 케이스를 모두 버리고 디스크와 북클릿만 챙겼다.

지금까지도 이 시즌이 되면 꼭 다시 찾아 듣는

나의 애착 크리스마스 캐럴 컬렉션!


세월이 뭍은 것들은 모두 소중하다.

지난 시간들만큼 삶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