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을 좋아할 결심.
2022년, 나는 두 편의 멋진 영화를 통해
운명적인 클래식 한 곡을 만난다.
박찬욱 감독의 < 헤어질 결심 >과 토트 필드 감독의 < TAR >.
두 작품의 중심에 공통적으로 흐르던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 Adagietto ]이다.
현악과 하프만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902년, 말러가 운명의 연인 알마에게 보낸
음표로 쓴 연서라고 해석된다는 점은
이미 많은 연구와 증언을 통해 확인된 바 있다.
특히 브루노 발터는 그의 말러에 관한 회고록에서도
이 곡이 의미하는 말러의 인간적 면모와 정서적 결을 여러 차례 언급한다.
Adagietto는 오래전부터 영화 음악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 베니스에서의 죽음 ]에서 이미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2022년의 두 영화가 [ Adagietto ]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긴 호흡, 응축된 감정, 말로는 표현하기 미묘한 감정과 서사를 흐르는 선율과 울림으로 대신한다.
이 곡은 관계와 균열 그리고 권력과 욕망을 다루는
두 영화의 내면을 정교하게 맞물고 스크린을 색칠한다.
그 한 곡에서 시작된 관심은,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두 권의 벽돌 같은 말러 평전을 읽게 만들었고,
브루노 발터의 회고록을 뒤적이게 했으며
여러 지휘자의 해석을 비교해 듣기 위해 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게 했다.
같은 악보라도 템포, 프레이징, 오케스트라의 규모, 강조하는 악기의 차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적 서사가 펼쳐진다.
예를 들어 레너드 번스타인의 해석은 감정의 진폭이 극단적으로 드라마틱하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오케스트라 안에서의 투명한 구조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미 음반사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는 감상평을 뒤로하더라도
하나의 악장을 두고도 이렇게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클래식의 표현력과 해석력이 얼마나 오묘하면서도 방대한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애플 뮤직에 있는 [ Adagietto ]를 며칠째 뒤적여서
6시간이 넘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몇 주 동안 한 곡만 들었다.
클래식의 위대함에 대한 진심 어린 경외심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 재즈의 계절 / 김민주 작가님 )
20대에 떠난 짧은 가족 여행 중에
우연히 들른 재즈클럽에서 처음 만난 재즈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
두 영화를 통해 만난 말러의 교향곡은 한동안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였던 클래식의 위대함이
귀를 통해 머리와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순간.
보통,
진입장벽이 높은 취미에 빠져든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하나의 경험이 또 다른 비슷한 경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게 된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오덕"이 되어가는 길이라고도 한다.
재즈가 그랬고 독서가 그랬다.
몇 년을 찾아 듣고 읽고 헤매면서 나름의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자기만의 또 다른 경험적 만족을 채워가는 방법에 익숙해져 간다.
자아~ 이제 내게도 클래식인가?
기본적으로 대학 4년간 서양음악사 3학점짜리 4개 수업을 들어야 했고
그 뒤로도 중간중간 관심이 있어
대략적인 서양음악사의 맥락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크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즈를 긴 시간 동안 듣고 공부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어떻게 찾아 듣는지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클래식도 비슷하거나 또는 좀 다르겠지만
크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덥석 대들어 보았다.
하지만 보기 좋게 한방 얻어맞는다.
방대하다.
방대해도 너무 방대하다.
비유하자면
내게 말러의 [ Adagietto ]는 우주가 탄생하는 시작인 빅뱅의 찰나였고
클래식의 세계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우주와 같았다.
고대와 중세시대의 음악은 건너뛰더라도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작곡가들
그리고 그들의 곡들을 연주한 수많은 연주자들, 지휘자들의 오케스트라.
한 작곡가의 유명한 한곡만 찾아 가장 유명하다는 연주만 찾아 듣는다 해도
끝이 나지 않을 막막함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클래식 명곡들은
재즈 연주자들의 연주들까지 흥미로워 그 범위는 또다시 늘어난다.
이런 막막함을 해결해 준 책을 만난다.
그리고
하나씩 다 찾아 듣고 하나씩 다 알고 들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깨닫는다.
편하게 그리고 넓게 클래식에 젖어드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너무 깊이 아는 것보다는 전체의 분위기를 느끼며
그에 얽힌 사소한 이야기들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만들어 준 책이다.
작가 클레먼시 버턴힐은 BBC 방송국의 클래식 방송 진행자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며 2권의 소설을 집필한 전문 작가이다.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팟캐스트 Classical Fix를 운영하며
음악전도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17년 < Year Of Wonder : Classical Music For Every Day >라는 책으로
클래식 입문자들을 위해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등 전통적인 거장들부터 현대 음악까지
매일 하루하루 감상할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클래식의 정수를 맛볼 수 있게 1권을 집필한 것이
국내에는 < 1일 1 클래식 1 기쁨 >이라는 제목으로 2021년에 발간된다.
음악가, 음악에 얽힌 이야기 또는 작가 본인의 일상들로 쓰인
짧은 수필 형식의 친근한 그녀의 음악 소개는
부담 없이 읽고 싶은 만큼 분량에 욕심을 내지 않고 쉼을 즐기며
데일리 루틴으로 음악을 감상하기 정말 좋은 플레이리스트이다.
책은 1년 12개월을 각 달별로 나누고, 다시 날별로 감상해야 할 곡들을 소개한다.
친절하게도 그 달이 시작하는 첫 페이지에는 QR코드로 연결된 유튜브에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해 두어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해 두었다.
요새 유행인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음악이 아닌
전문적인 음악가이자 클래식 방송 진행자가
인간적인 시선으로 선별한 "진심 어린 선곡"으로 이루어진 클래식 플레이리스트라니.
그것 자체로서 감동이다.
독자는 의무감 대신 사적인 호기심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딱딱한 음악 이론이나 역사 중심의 설명이 아닌,
저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작곡가의 인간적인 에피소드를 친구처럼 다정하게 들려주는 문체는
이런 진심 어린 선곡을 더욱 진실되게 느껴지게 한다.
전작이 클래식의 즐거움을 알리는 '에너지'에 집중했다면,
2권인 < Another Year Of Wonder : Calssical Music For Every Day >는
저자가 뇌출혈이라는 큰 시련을 겪은 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느낀
'위로와 치유'의 정서가 짙게 베인 한층 더 깊은 진심이 담긴 선곡이다.
2020년 1월, 작가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언어 능력을 잃었을 때,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고 한다.
2권인 < 1일 1 클래식 1 포옹 >은
특히 음악이 인간의 생존과 회복에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집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22년 12월에 출간되었으며
전작보다 여성 작곡가, 유색인종 작곡가,
그리고 현대 음악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클래식의 경계를 확장하며 "이것도 클래식인가?" 싶을 정도로 새롭고 신선한 곡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듣으며 읽을 수 있다.
말러의 [ Adagietto]에서 시작된 충격.
그리고 방대한 클래식을 한 번에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시간 속에 천천히 스며들며 익혀야 할 세계라는 사실걸 깨닫게 해 준 책.
클레먼시 버턴힐이 쓴,
이 두 권의 책은 음악감상자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는 멋진 가이드 북이다.
무한한 우주를 한 번에 보려 하지 말 것.
하루의 공기처럼,
한 곡 한 곡에 젖어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