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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줄거리 요약, 결말 해석 총정리

영화 <어쩔 수가 없다> 리뷰

by 그린
기본 정보

장르 스릴러, 코미디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39분

감독 박찬욱

출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시놉시스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만수는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에 괴로워하던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무작정 [문 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지만, ‘선출’(박희순) 반장 앞에서 굴욕만 당한다. [문 제지]의 자리는 누구보다 자신이 제격이라고 확신한 만수는 모종의 결심을 한다.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취업에 성공하겠다.”




줄거리 요약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유만수는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하고, 3개월 안에 재취업하겠다는 다짐짐을 하지만 번번이 좌절한다. 그러던 중 과거 경쟁사 ‘문 제지’의 반장 최선출을 만나면서, ‘그가 사라지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위험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만수는 가짜 구인광고를 내 경쟁자를 유인한 뒤, 지원자들 가운데 자신보다 점수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구범모, 고시조를 차례로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최선출까지 없앤다. 결국 그는 원하던 자리에 앉게 된다.


결말 해석

만수는 끝내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목표했던 문 제지 반장 자리에 앉는 데 성공한다. 그는 만족스러워하며 기뻐한다. 이상하다. 살인을 저질렀고 인간성과 윤리를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행복이 서려 있다. 만수 입장에서 결말은 명백한 해피엔딩이다. 여기서 영화는 냉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경쟁 사회에서 결국 누군가는 이렇게라도 자리를 차지한다. 그 성취는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당연하고, 그래서 행복하다. 이 얼마나 잔혹한가.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이것은 과연 승리인가?'

그리고 현실은 무심히도 대답한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


1) 사회가 만든 괴물

만수의 선택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이나 광기로만 볼 수 없다. 그는 오랫동안 성실히 일했지만, 하루아침에 버려졌고, 재취업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불안정한 고용, 끝없는 경쟁, 나이와 경력에 대한 편견은 그를 점점 코너로 몰아넣었다. 결국 만수는 괴물이 되었다. 아니, 제도와 사회가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살아남고자 했을 뿐이고, 사회는 그에게 합법적이고 정당한 경로를 남겨주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개인의 죄책감보다 구조의 폭력을 더 크게 부각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개인의 변명이 아니라,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에게 강요하는 절망의 언어이기도 하다.

2)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무겁고 잔혹한 이야기 속에 여러 블랙 코미디적 장치가 배치되어 있다. 살인을 준비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허둥대는 만수의 모습, 어딘가 어설픈 범행 장면들은 잔혹함보다 아이러니한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불편함으로 바뀐다. 그 우스꽝스러움이 사실은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취업, 해고, 경쟁, 무능력이라는 단어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결코 낯설지 않다. 영화의 블랙 코미디적 요소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블랙 코미디가 아닌가.



인물 분석

영화의 세 인물, 만수의 경쟁자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표상하는 얼굴들이다.


구범모는 만수가 스스로와 가장 동일시하는 본모습이다. 그는 꾸밈이 없고, 찌질하고 꼬질한 동시에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발가벗고 방귀를 뀌며,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혼자 바닥을 구르는 그의 모습은 무력하지만 인간적이다. 만수가 그를 죽이는 과정은 가장 지저분하고 힘겹다. 여러 겹의 장갑을 벗고, 총을 쏘면서도 주저하며, 시체조차 직접 처리하지 못한다. 이는 자기 자신을 지워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가를 보여준다. 결국 이성민은 만수의 가장 근원적인 자아, “나는 악인이 아니다”라는 자기 위안을 대변한다.

고시조의 캐릭터는 겉으로 보이는 이상적인 자아, 즉 사회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자신이다. 첼로, 사교댄스, 테니스, 분재, 대형견 등 세련된 소품들로 둘러싸인 만수의 이미지는 그가 추구하는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자아는 실속이 없다. 구체적 서사도, 깊이도 부재하며, 결국 껍데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만수가 차승원을 제거하는 일은 훨씬 수월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하고, 시체를 아름답게 정리하듯 처리한다. 본질 없는 외피를 버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최선출은 원초적 본능과 야만성을 드러내는 자아다. 폭소하다가 칼인지 술인지 모를 물건을 꺼내는 그의 예측불가한 모습은 본능과 충동을 상징한다. 결국 그를 죽인다는 건 곧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고, 야만성을 제거하는 행위다.

이 세 인물을 제거하는 과정은 곧 만수가 스스로의 본모습, 잘난 모습, 못난 모습을 차례로 지워내는 과정이다. 자아의 종말을 택함으로써 그는 기업의 부품으로 다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는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손바닥에 적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유만수의 비극은 곧 자아를 몰살시킨 뒤에야 사회 속에 편입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원작과 차이점

<어쩔 수가 없다>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The Ax>를 원작으로 하지만, 박찬욱은 이를 한국 사회의 맥락 속으로 강하게 이식한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미국의 한 제지 회사에서 해고당한 중산층 남성으로, 생존을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간다는 줄거리는 동일하다. 그러나 영화는 한국의 고용 현실과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한층 강화한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인물 구성과 해석의 층위다. 원작에서 경쟁자들은 실제적인 인물이며, 주인공은 그들을 현실 속에서 차례로 제거한다. 반면 영화는 경쟁자들을 주인공 내면의 표상으로 변주한다. 본모습, 과시적 자아, 원초적 본능이라는 세 가지 얼굴은 실존 인물이기보다 자아 해체의 과정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덕분에 영화는 허술해 보일 수 있는 설정을 심리적 리얼리티로 전환시킨다.

또한 원작이 블랙 코미디와 풍자를 통해 “누가 살아남는가”라는 문제를 제시하는 데 머무른다면, 박찬욱은 이를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 확장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은 원작에서의 냉소적 뉘앙스를 넘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내뱉는 절망의 언어로 재맥락화된다. 원작이 중산층 남성의 불안을 그려냈다면, 영화는 보다 보편적인 시대의 초상을 담아낸 것이다.



미장센 총정리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면접실은 권력과 감시, 그리고 끝없는 경쟁을 상징하며 차가운 무채색의 톤으로 주인공을 압박한다. 제지 공장과 종이는 곧 인간 노동의 상품화,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는 존재의 운명을 은유한다. 집이라는 사적 공간은 원래 안식처여야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죄책감과 고립을 드러내는 불안한 무대로 기능한다. 살인 장면에서 활용되는 빛과 그림자는 만수의 내면이 점차 어두워지는 과정을 시각화하며, 첫 살인의 서툰 동작과 마지막 살인의 동작은 그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비 효과를 낸다. 음악 또한 중요한 층위를 이룬다. 런던 컨템포러리 오케스트라의 불협적 사운드는 만수의 불안정한 심리를 반영하면서, 블랙 코미디적 순간에 불편함을 증폭시킨다. 이처럼 공간, 소품, 조명, 음악이 유기적으로 얽히며 영화의 주제인 ‘사회가 만든 괴물’이라는 메시지를 시각적·청각적으로 각인시킨다.



박찬욱의 질문들

선한 동기가 악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가족을 지키고 생존을 위해 저지른 범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영화는 답을 선뜻 주지 않는다. 오히려 유만수가 목표를 달성한 뒤 만족스러운 얼굴을 짓는 장면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유예한 채 관객에게 선택을 떠넘긴다. 사회가 개인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만수가 괴물이 된 것은 그의 의지이면서 동시에 제도의 산물이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개인의 일탈을 꾸짖는 차원이 아니라, 냉혹한 경쟁 구조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향하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의 언어가 반복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현실의 규칙이 되어버린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박찬욱은 바로 그 지점에서, 관객이 불편함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뇌를 빼고 자아를 버려야

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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