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slight (1944)
"가스라이팅 (Gaslighting)"
1944년에 발표된 흑백영화인 "가스등"은 이제 거의 표준어가 되다시피 한 신조어 "가스라이팅"의 기원 같은 작품입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가스라이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등장인물의 행동은 "가스라이팅"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스라이팅"의 메커니즘을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1. "가스라이팅"의 가해자는 반드시 의도가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재미로 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2. "가스라이팅"은 무턱대고 한 번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꼼꼼하고 철저한 준비단계가 있습니다.
3.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신뢰가 있고, "그럴리가 없어"라고 스스로에게 원인을 돌립니다.
4. "가스라이팅"의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지 않고 더욱 증폭되고 누적됩니다.
5. "가스라이팅"을 일단 한 번 당하고 나면 회복이 매우 어렵습니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작동 메커니즘이 이 영화의 구석구석에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관객의 뇌리에 각인 시키는 것은 "가스라이팅" 피해자인 명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입니다. 처음의 단순 의심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정신장애로까지 진행되는 그 어려운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냅니다. 처음에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처녀의 얼굴이었느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피폐해저가는 그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얼굴에 담아내고, 마지막에 자신이 "가스라이팅" 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가해자에 대한 일말의 용서도 없는 단호함을 서늘하게 표현합니다. 그녀의 대표작인 "카사블랑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연기입니다. 그녀가 이듬해의 모든 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을 싹쓸이 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줄거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장소는 늘 안개 자욱한 "런던". 당시의 조명은 "가스등"이 전부입니다. 가로등도 "가스등"이고, 가정집의 조명도 "가스등"입니다. 저녁만 되면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뿌엿게 변합니다. 그리고 보석에 대한 소유욕에 사로 잡힌 "그레고리 안톤 (샤를르 부와이에)"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는 성악가의 피아노 반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자신이 피아노 반주를 해주던 성악가 "앨리스 앨퀴스트"가 소유한 4개의 다이아몬드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기필코 자신의 소유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결국 성악가를 죽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이아몬드의 위치는 모릅니다. 그리고 범인을 잡지 못하고 미제사건으로 끝납니다.
이제 성악가의 조카인 "폴라 앨퀴스트 (잉그리드 버그만)"가 이모처럼 되려고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 연습을 하는데 잘 안됩니다.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 피아니스트는 바로 "그레고리 안톤". 이제 관객의 뇌리에서 서스펜스가 시작됩니다. 큰 일 났네. 이모의 살인자와 사랑에 빠졌네. 그러면 그는 "폴라"마저 죽일까요? 그는 훨씬 교묘한 방법을 씁니다. 바로 그녀를 정신적으로 황페화시키고 결국은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 고차원적인 심리 기술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부터 두 주연배우의 힘이 발휘됩니다. "그레고리"는 끊임없이 "폴라"에게 뭔가를 기억하게 하고, 끊임없이 그 기억을 상기하게 하면서, 확신이 없어 안절부절 못하며 얼버무리는 "폴라"에게 잘못된 기억이라고 우깁니다. "그레고리"의 손아귀에 든 "폴라"는 남편에 대한 신뢰로 인하여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돌립니다. "폴라"는 자신의 기억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신의 정신에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그레고리"는 밖에 나가면 큰 일이 날것처럼 포장하며 그녀를 집에 완전히 가둬버립니다. 그리고 대낮에도 어두운 집은 그녀의 정신을 더욱더 파괴해 나갑니다. 거기에 새로 들어온 하녀 "낸시 (안젤라 랜스베리)" 마저 지극히 차갑게 그녀를 대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하녀를 막대하는 남편을 나무랍니다. 동시에 "낸시"에 대한 두려움이 싹틉니다. 모두 그녀가 지극히 선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밤마다 일하러 나가는 척 하면서 동네 골목을 돌아서 빈 집으로 들어가 자신의 집의 지붕으로 침투하여 "폴라"의 이모의 짐들을 보관한 다락방에 들어가서 짐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이 "폴라"의 침실 바로 위에 있습니다. "폴라"는 아무도 없어야 할 지붕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게다가 다락방의 가스등을 점등하면 다른 방의 가스등이 약해지는 문제 때문에 방이 어두워 집니다. "폴라"는 깜빡거리며 약해지는 "가스등"으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이 정도면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 영호의 엔딩 입니다. 범인을 못잡고 미제사건으로 끝난 "앨리스 앨퀴스트" 사건에 관심 가진 경찰 "브라이언 캐머런 (죠셉 코튼)"이 "폴라"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고 적극적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그레고리"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그의 뒤를 쫒다가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범행 현장을 덥치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이 영화는 배우들도 뛰어난 연기를 보이지만 탁월한 미장센과 흑백의 절묘한 대비, 그림자의 절묘한 사용등 감독의 연출력도 한 몫합니다. 특히 집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촬영과 미장센이 압도적입니다. 흑백영화임에도 보다보면 그 사실조차 잊게 됩니다. 오히려 흑백의 톤이 이 영화를 단순 미스테리 스릴러를 넘어 서스펜스 가득한 심리극으로 만듭니다. "카사블랑카"처럼 컬러화 되면 안되는 명품 고전 흑백 영화 "가스등"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