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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편

무협 세계관과 동양의 시간

by cherry

요즘 ‘무림세가 천대받는 손녀 딸이 되었다’ 라는 작품을 보고 있다. 흔한 회빙환 클리셰의 로판 느낌인데 무협 세계관이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어려서는 서양 중세풍의 의상이 화려해서 좋았는데 요새는 취향이 바뀌었는지 무협에 눈길이 간다. 이런 무협 세계관의 작품에서는 동양의 다양한 시간을 지칭하는 어휘들이 나오는 데 이는 동양의 문화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에는 시간을 단순히 흘러가는 숫자의 흐름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은 자연의 순환, 인간의 삶의 리듬,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깊이 맞물려 있었다. 전통적인 시간 단위인 일다경(一茶頃), 일각(一刻), 한식경(一食頃), 한시진(一時辰), 그리고 한나절과 반나절은 단순한 측정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옛사람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일다경(一茶頃)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이라는 뜻을 지니며, 대략 15분 정도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을 재는 단위로서뿐 아니라, 여유와 사색의 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중국과 한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차를 마시는 행위가 단순한 음료 섭취가 아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사색하는 의식으로 여겨졌다. 조용한 정원에서 따뜻한 찻잔을 들고 자연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서는 그 순간이 바로 '일다경'이었다. 또한, 차는 선(禪) 문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선사들은 차를 마시며 번뇌를 내려놓고, 짧지만 충만한 시간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일다경"은 단순한 시간 단위라기보다는 삶 속의 작은 쉼표로,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커피 한 잔의 여유"와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일각(一刻)은 한 시간을 4등분한 15분을 가리킨다. 하지만 단순한 시간의 분할을 넘어서, 중요한 순간이나 긴박한 찰나를 상징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일각을 다투다"라는 표현은 매우 촉박한 상황을 묘사한다. 이는 과거 농경사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농사일이나 특정 의례에서 아주 짧은 순간이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다. 날씨의 변화나 물길을 다루는 일에서 '일각'의 차이가 풍년과 흉년을 갈랐기 때문이다. 또한, 일각은 자연의 순환을 세밀히 관찰하려는 태도를 반영한다. 옛사람들은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읽었고, 그 짧은 찰나조차도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따라서 "일각"은 단순한 시간의 구분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결정적 순간을 나타내는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식경(一食頃)은 "한 끼를 먹는 동안"이라는 뜻으로, 대략 30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단위는 단순한 식사의 시간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통의 시간이라는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에는 가족, 이웃,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사회적 행위였다. "밥상머리 문화"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情)을 나누는 시간으로 여겨졌다. 밥을 함께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때로는 고민을 털어놓는 그 시간은 공동체를 더욱 단단히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한식경은 자연의 흐름에 맞춘 식사 시간을 반영한다. 하루 세끼가 규칙적으로 정해진 것은 현대의 개념이고, 과거에는 자연스러운 배고픔에 따라 식사 시간이 정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식경"이라는 단위를 사용한 것은, 식사가 단순한 생존 행위를 넘어서, 문화적 의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한시진(一時辰)은 하루를 12등분한 시간 단위로, 약 2시간을 의미한다. 이 단위는 12지지(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와 맞물려 사용되었다. 각각의 시간대는 자연 속 특정 동물의 행동과 연결되었으며, 이는 농경사회에서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자시(子時)는 쥐가 활발히 움직이는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의 시간이었으며, 오시(午時)는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르는 낮 11시부터 1시까지의 시간을 가리켰다. 이런 식으로 하루를 12개의 시진으로 나누어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을 조화롭게 맞추려 했다. 또한, 한의학에서는 이 한시진을 인간의 장부(臟腑) 순환과 연결지었다. 예를 들어, 폐는 새벽 3시에서 5시인 인시(寅時)에 가장 활발히 작용한다고 여겼다. 이런 관념은 단순히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체와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한나절은 하루의 절반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오전 6시에서 정오까지 또는 정오에서 오후 6시까지를 가리킨다. "나절"이라는 말 자체가 하루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여기에 "한"이 붙어 절반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나절은 농경사회에서 특히 중요한 시간 단위였다. 농부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한나절은 일의 첫 구간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또한, 한나절이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을 나누는 개념을 넘어, 일정한 시간 동안의 활동이나 경험을 묶어 표현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한나절 내내 비가 왔다"는 문장은 시간의 양과 함께 그 시간대의 분위기까지 전달한다.

반나절은 한나절의 절반을 의미하며, 대략 3시간 정도의 시간을 나타낸다. 반나절이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 짧지만, 일정한 분량의 일이나 활동을 의미할 때 자주 쓰였다. 예를 들어, "반나절 걸리는 일"이라는 표현은 그 일이 오래 걸리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함을 의미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반나절 단위로 일을 계획하거나 휴식 시간을 정하기도 했다. 또한, 반나절은 "잠깐"이나 "조금 긴 시간"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해, 상황에 따라 그 길이가 유동적으로 해석되었다.

이처럼 일다경, 일각, 한식경, 한시진, 한나절, 반나절과 같은 전통적인 시간 단위는 단순한 측정의 수단이 아니었다. 이는 옛사람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갔던 태도,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중시했던 문화적 가치를 드러낸다. 일다경은 짧지만 깊은 여유와 사색을 의미하며, 일각은 순간의 소중함과 긴박함을 상징한다. 한식경은 공동체적 유대감과 정을 나누는 시간으로, 한시진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반영한다. 한나절과 반나절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시간을 나누고, 일과 여가를 조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전통 시간 단위는 현대의 빠르고 효율적인 시간 관리와는 대비되며, 느림의 미학과 삶의 여유를 되새기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시간을 더 깊이 음미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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