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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 홍콩의 블루스

<약속 너머의 세상>

by 춘고

기억을 통조림 안에 담을 수 있을까?

한 존재가 내딛는 생의 첫 들숨부터 종막의 날숨까지 단절 없이 쏟아져 내리는 기억들은 오로지 하나의 용기에 담겨 밀폐된다. 그 ‘밀폐용기’를 우리는 ‘육신’이라고 발음한다.

어떤 의미에서 육신은 또 하나의 통조림 통으로서 하염없이 외부로부터 밀폐되어 있다.


밀폐의 완결성

밀폐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내적 완결성을 가진다고 믿는다.

통조림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육신이 그러한 것처럼 밀봉되어 철저히 외부로부터 분절되는 순간, 거시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시간적 셈법이 달라지고, 물리적 성질도 변한다.

그 결과로써 통조림이 고유한 유통기한을 획득하는 것처럼, 인간의 육신이 동일한 밀폐체로서 획득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고유한 ‘자아’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밀봉(밀폐)은 새로운 완결성을 지닌 체계의 창출이자 거시세계로부터 분절된 또 하나의 세계다.

영화는 분절된 공간 속에 놓여진 것들의 시간적/ 물리적 체계의 변화에 대한 포착을 하고 있으며, 거시세계로부터 외면되어 자신만의 체계를 가져버린 미시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공간의 유통기한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만료되듯, 그리고 생기가 돌던 육신도 언젠가는 사체로 변해버리듯... 우리는 관찰 가능한 범위 내에 미시적인 대상들의 끝은 어렵지 않게 상상한다.

하지만 ‘공간’이라는 추상이면서도 구상인 것. 매 순간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으나 결코 만질 수 없는 것. 무형으로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대상이 거기 놓여 있다는 사실의 반영으로서만 감각되는 ‘공간’이라는 것이 정해진 유통기한이 있음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1842년, 아편전쟁으로 인해 영국령이 된 이후 한 세기 반이 흘러 다시 중국으로 반환을 고작 3년 정도 남겨둔 1994년의 홍콩, 하나의 거대한 체계가, 그리고 한 공간의 유통기한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모든 공동체가 인지하고 있는 시점에서 영화 중경삼림은 시작된다.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그런 사회적 현실의 압력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자체가 영화에서 언급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삶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매 순간 다양한 감각들을 인양 받지만, 그 감각들이 결국 공통된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됨으로써 한 공간의 유통기한이 다하고 있음을 예감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공간의 끝'이라는 개념을 다만 관념으로 인지할 뿐, 감각 세포의 전기적 신호를 통해서는 인지할 수 없다.


관념으로서의 공간

공간이 담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도시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공간 속에는 마천루가 즐비한 높은 건물들과 불야성 속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도시라는 단위의 제약적 공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사랑을 하거나, 생산적인 사회활동을 하며 때로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공간 속에 담겨 있다. 공간은 건물과 감정, 행위를 담을 수도 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을 미래에 대한 상상, 즉 사람들 사이의 약속도 담겨 있다.

따라서 공간 속에는 물성을 가지고 실재하는 것 이외에 비존재/비실재적인 대상까지 담음으로써 물리적 공간과 관념적 공간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공간적 특성을 굳이 분류하며 살지 않기 때문에 공간 속에는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그런 차원에서 사라져가는 도시를 인지하는 인간, 다시 말해 세기말적 분위기가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인물들이 감각하는 허무와 염세라는 감정이 도시 속에 산재하는 물성과 비물성의 대상들에게 어떻게 투영되는지 관찰해 보는 것.(마치 663이 그랬던 것처럼)

동시에 그 감정들이 공간의 특성인 무한성과 속박성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내딛어야 할 미래라는 시간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어 가는지를 감각적인 화면과 특유의 색감을 통해 영화는 말한다.


부유와 고립 그리고 존재적 불안

영화의 주인공인 경찰 223(또는 하지무, 금성무 분)과 경찰 663(양조위 분)은 그들에게 부여된 직업과 붙여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국가의 시스템에 복무한다.

그러나 반환을 앞둔 이 도시의 경찰이란 소속되어 있지만 곧 소속되지 않을 중의적 인물로서 도시가 처한 운명과 깊숙이 싱크(sync)된 존재로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행동은 대체로 현실을 딛지 못하고 부유된 것처럼 무욕적, 무감각적이지만 반대로 오랜 기간 채우지 못했던 깊은 허기를 달래듯이 집착적인 방식으로 특정한 사건을 기억하려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듯 주변의 사물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주입하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또한 두 사람은 자신의 연인이 떠나가는 것에 있어 다소의 감정 표현과 감각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그 담장 너머를 무심하게 외면한다.

이것은 마치 과밀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살갗을 스치며 지나치지만 결코 서로의 영역에 닿지 않으려는 도시의 에토스이자 동시에 일종의 자기 고립이다.

이 고립은 육신의 밀폐성에 근거한 ‘내적 완결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부작용처럼 발생하는 그리움과 고독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결핍이며 밀폐된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절대적 불안, 즉 원죄에 가깝다.


인간의 자아가 가지는 근본적인 결핍성, 거기에 현실 세계가 처한 불확실성이 결합되어 희망을 잃어버린 이 도시 속에서 두 주인공이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일상을 기억하려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던 것이 아닐까.


시스템의 자기논리 = 말종인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말종인간’이라는 퇴화된 인류의 종말상을 제시한다.

퇴화된 인류의 종말상으로서, 그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허무주의에 빠져 고통과 열정, 창조와 의미를 탐구하는 일이 거세된 인간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왜곡시키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미 종말을 알고 있으니 현존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그들은 타인과 변화에 무관심하다.

마치 종말을 아는 말종인간들처럼, 94년… 반환을 앞둔 홍콩이라는 도시에서 경찰 223이 ‘삐삐’를 버린 것처럼, 663이 ‘편지’와 ‘사랑스런 침입자’에게 무심했던 것처럼….


감시하는 자와 비행하는 자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223과 663의 직업은 경찰이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고 감시하는 자로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직업 특성상 시스템을 초과할 수 없으며 시스템의 변형과 이탈을 막는다.

반면에 승무원은 국가라는 시스템 사이를 넘나드는 직업이며, 마약 밀매업자는 시스템의 밖에서 활동하는 자, 패스트푸드점 알바는 임시 고용직으로서 직업적 고정성이 낮고 이직 가능성이 높은 자다.

영화는 세기말의 허무함과 염세적인 태도를 가진 인물로서 두 경찰을 지목하고 있지만 이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들로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버린 663의 전 애인이었던 승무원, 끝내 자신의 보스에게 예리한 총탄을 날리고 스스로 자유로워진 마약 밀매상, 과감하게 짝사랑하는 사람의 자택에 몰래 침입하여 청소를 해놓거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짝사랑의 고백을 뒤로 미루고 승무원이 되어 나타난 인물 역시 패스트푸드점 알바였다.

이들 셋은 두 경찰과는 달리 영화 내내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셋의 공통점이 여성들이라는 사실이 남성과 대비됨으로써 내포하는 의미는, 시스템의 체계를 구축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대체로 남성 집단이고, 시스템의 존재적 의미라고 할 수 있는 불확정성에 의한 ‘불안’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남성 집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서열문화나 지배체계가 성별에 따른 공간을 다루는 방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은유한다.

다시 말해서 공간적 체계가 무너진 비문명적 상황에 불확실성을 배제하려는 남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영화는 그려낸다.


유통기한의 초과

시스템의 붕괴에 취약한 남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었다.

남성은 자신이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지를 기약하는 방식으로서 시스템 속에 여성을 가두어 도구처럼 이용하기도 했으며, 어쩌면 오랜 세월 동안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던 역사가 의미하는 바는 여성 고유의 자유분방함, 시스템을 초과하여 자신만의 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지에 대한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사랑의 기한이 만년이었으면 좋겠다는 223의 대사 역시 시스템의 영원성에 대한 바람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두 남성 역시 결국 여성들로부터 구원받는다.

실연으로 인한 자신의 내면적 체계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 방황하지만 새로운 여성을 만남으로써 무너졌던 체계를 딛고 새로운 체계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남성이 여성에게 기울려 있으며,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확고한 미래다.


반면에 여성인 마약 밀매업자는 자신의 보스가 지정한 문제해결 기한을 오히려 보스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초과한다.

즉, 시스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닌, 초월하는 방식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한 것.


또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라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로 일하는 페이는 그가 일하는 가게의 이름이 그런 것처럼 ‘탈출’의 메타포를 가지고 있으며, 663의 집으로 침투하여 그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결국 663을 새로운 체계로 이끈다.


약속 너머의 세상

우리는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약속의 무덤에서 살아간다.

시스템은 어느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려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기반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상당한 강도의 균열이 일어나기 전까지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 속성이 ‘약속’을 의미하기 때문에 대체로 관념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해 주던 시스템이 무너진다고 한들, 또는 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진다고 한들 나의 육신 자체는 기존의 존재방식의 관성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 여전히 직립하며, 어떤 시스템 너머에서도 여전히 나의 육신은 기존의 심장박동과 세포분열을 반복하며 놓여 있을 것이다.

즉, 즉 거시세계로부터 분절된 내적 완결성을 가진 밀봉체로서 하나의 체계가, 그리고 하나의 국가가 사라진다고 하여도 여전히 그 다음을 동일한 신체로 맞이한다.

그렇게 시스템은 결국 관념일 뿐인 것이기 때문에…


223이 금발의 마약밀매상으로부터 생일축하 메시지를 받고 나서 언제 그래냐는 듯이 다시 미소지었던 것처럼, 663이 경찰을 그만두고 페이가 근무했던 식당을 인수한 후 인테리어를 하며 페이를 기다렸던 것처럼…, 유통기한 너머에 존재한 또 다른 유통기한이 맞이하는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 있음으로 인해 유통기한은 언제나 반복해서 초월되는 것일 게다.

일상의 영원한 반복, 유통기한이 초과된 세상 이후에 또다시 만난 새로운 유통기한...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과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의 죽음, 나의 끝을 이미 안다고 하여 나의 존재가 의미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무한한 반복 속에서도 그리고 약속 너머에서도 나의 육신이 여전히 나로서 놓여 있을 수 있음이 의미하는 건....

나는 완전하게 밀봉된 나로서 한없이 고유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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