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고 Sep 01. 2023

어른은 모방되는가.

<어른의 시뮬라크르>

  ‘인류’라고도 말하는, 또는 그 자체로 언어의 바다, 언어의 집단체라고 발음해도 이상하지 않을 생물체로서 오늘도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과업처럼 답을 내려야만 하는 물음이 있다면, 첫  번째는 “왜 사는가”, 두 번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싶다.


예상컨대 첫 번째 물음이었던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아마도 이 육신이 생기를 잃고 물러져 갈 즈음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그중 가장 소중한 순간을 골라야 할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막상 결정의 순간이 눈앞으로 다가온다면 질문을 바꾸어 ‘왜 사는가’가 아닌, ‘왜 살았는가’에 대한 답을 해야 마땅한 것 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이유로 첫 번째 물음은 삶의 끝자락으로 미루더라도, 두 번째 물음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한 앞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당위적 문제로서 순간마다 대답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듣는 순간부터 어려운 대답이다. 나름 짧지 않은 세월 살아가며 고민해 본 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그나마 한 가지 규정해 볼 수 있는 건, 개인의 내면 속에서 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 자아를 넘어 준거된 집단 속에서 타인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살면서 이런 질문에 대해 어른들에게 익숙하게 들어왔던 말들은 보통 착하게, 정직하게, 바르게, 자신감 있게… 그리 살아가라. 라며 이것저것 좋아 보이는 단어들을 끌어와 들려주곤 했다.

저런 말들은 무심코 듣기엔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비슷한 결을 가진 말들이어서 모두를 적당하게 포괄할 수 있는 단어를 골라 말해보면… 이런 것 아닐까?


“어른스럽게 살아가라”  


기억이 맞다면 적어도 어린시절부터 항상 ’ 어른’이란 표상은 위에 나열했던(착하게, 정직하게, 바르게… 등) 긍정적인 말들을 모두 다 만족하는 하나의 완성체로서 받아들여졌었고, ‘어른’ 그 자체 만으로도 '인정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주변 어른들로부터 강요받고는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런 인식들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빈번히 겪게 되면서, 나에게는 어른에 대한 인식적 회의가 생긴 지도 이미 오래 전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저 그러고 말 뿐, 생각을 개진하여 정리해 본 적은 없어서, 이 참에 ‘어른’이란 의미는 현재 내 안에서 어떻게 수렴되고 있으며, 어른스러운 행위에 대한 기준과 존재론적으로 어른을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을지 판단해 보고 싶다는... 이다지도 시답지 않은 이유를 들어서라도나마 어설픈 글을 써 본다.


(나에게) 기호로서의 어른의 의미와 규정

 '어른’이란 단어는 동시에 여러가지 뜻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실로 그 쓰임은 상황마다 조금씩 의미를 바꿔가며 흔하게 사용된다.


개인적으로 단어들 중에는 여러 의미를 동시에 포괄하거나, 또는 자가복제를 무한히 반복하는 바이러스처럼 무분별하게 자신을 복제하여 상황 자체를 삼켜버리는 단어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단어들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일상에서 그러한 단어들이 사용되면 세세한 감정상태를 단순한 형태로 뭉개버리거나, 의도에 따라서는 상급자/권력자가 자신에게 유용한 도구로서 사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예컨대 대박, 짜증 같은 단어는 본디 들어가야 할 적절한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단어(대박, 짜증)가 발화자의 평소 습관에 따라 쉽게 복제되어 버리는 바람에 세밀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뭉개버린다.(좋은 일이 생겨도 대박,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나도 대박, 깜짝 놀랐을 때도 대박 / 짜증도 마찬가지로 배고파도 짜증 나, 간지러워도 짜증 나, 하기 싫어도 짜증 난다는 표현 하나만으로 여러 상황이 대체되어 버린다.)


또한 최근 높으신 누군가 남발하는 '자유'라던가, 지금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어른'처럼 그 뜻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단어들의 경우에는, 대상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뭉개버리기도 하는데, 단어 특성상 흐릿한 범주를 규정함으로써 단어의 범주 안에 들어갈 대상과, 밖으로 배제할 대상을 발화자의 의도대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만적으로 사용되는 상황을 종종 보았다.


어찌 되었든 이 글은 어른에 관한 생각 글이므로, 어른이라는 단어에 한정하여 말해보자면 무엇이 어른이고, 그 범주는 어떻게 될까?

실제로 일상에서는 흔히 “어른스럽게 행동하라”, “어른처럼 보인다/어른답지 못하다.”, “너도 이제 어른이니까.”라는 방식으로 말하기도 하며, 어른에 대한 구체적인 참조물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조금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특정한 나이가 되었을 때도 어른이라 규정하거나, 나이에 관계없이 어떤 행동을 보고 판단하여 어른이라고 규정하거나, 때로는 구체적 설명은 생략된 채 어른답게 행동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규정방식인 '나이'로써 어른을 규정하는 것 조차 전 인류적으로 통일되어 있지도 않는 데다, 집단의 특성에 따라 요구되는 어른의 행위양식도 각기 다르며, 때로는 연령에 관계 없이 대상의 행위만을 보면서  어른스럽거나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주관적인 규정을 내리기도 한다.  


다시 말해, 언어라는 기호체계 속에서 ‘어른’이란 단어는 기표와 기의적 관계가 명확히 일치하지 않다는 점과,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앞서 말한 것처럼 뜻과 범주가 불명확한 단어의 특성을 이용하여 발화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기호에 맞게 해석할 수도 있는 기만적인 단어가 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어른에 대한 행위적 규정 (어른의 행위는 모방인 것인가.)

 나의 매우 얕은 과학지식을 들켜보자면..

모든 사람마다 [거울신경세포]라는 게 있다고 한다. 이 세포는 자신이 직접 행위할 때뿐만 아니라, 관찰자가 직접 행동을 수행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행동과 동일하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를 말하는데, 이것은 곧 관찰하는 행위는 모방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음을 내포하는 것이다.


굳이 거울신경세포를 들어 설명하지 않더라도 삶은 온통 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살아온 사람들을 마주한다.

자신과 동종인 그들은 거의 동일한 신체구조와 뇌구조, 비슷한 지능 수준을 가졌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모방하기 용이한 대상일 것이며, 실제로 우리의 성장기는 ‘모방기’라고 바꿔 말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행위적으로나 지각적으로 온통 타인에 대한 모방의 연속이다.


그럼 이 기준을 가지고 어른을 규정해 본다면 어떨까?

어른이란 일체의 모방행위를 성장기 거치는 동안 매일 쉴새없는 훈련으로  일정한 수준에 이른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한 모방훈련의 최소 기간은 대략 19~20세쯤 되는 것이고, 그 기간을 지나고 나면 독립한 개체로서 인생 대부분의 갈등상황도 대처할 수 있는 것일까?

거기다 20세를 넘어 수십 년 동안 살아온 고령자라면, 응당 그들이 살아온 세월만큼의 능숙함을 인정하여 그들이 행하는 행위를 대부분을 어른스러움의 준거로 참고하는 것은 맞을까?


당연하겠지만, 이것만으로 어른을 규정하기엔 매우 부족하다는 걸 안다.

우선 현실에서 일어나는 비도덕적 행위 중 대다수는 어른들이 저지른 어른답지 못한 모순적 행위이고, 그러한 비도덕적 행위 조차도 결국 모방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또한 비도덕적 행위에 관한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반대로 그 행위가 선한 행위였어도 단지 그것만으로 어른스러운 행위라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모방훈련을 통해 반사적으로 또는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선한 행동을 출력했다손 쳐도, 그것은 오히려 상호 간에 미리 약속된 행동이 실행되는 것에[ 불과하거나, 일종의 기계적 세팅 값이 자동으로 출력되는 것과 유사하므로, 그저 정해진 순서대로 사건이 진행되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일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어른스럽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어른스러운 행위에 대한 규정을 성립시킬 중요한 무언가 빠진 게 있다면, 아마도 ‘창의성’과 ‘개별성’, 아닐까라는 예감이 든다.

맞는 비유가 아닐 수도 있겠으나,  과거 미술을 전공했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처음 미술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에게 교육자는 무리하게 창의성과 개별성(독창성) 있는 그림을 요구하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밟아왔던 과정을 답습하도록 제안하고, 기존에 그려진 작품들을 모작하는 과정을 밟아나가며 기법들을 배운다.   

독창성 있는 작가가 되기까지 수많은 모작과 타인의 기술들을 체득하여 충분히 실력을 쌓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되는데, 이제부터 비로소 논해질 수 있는 '창의성'과 '독창성'이란, 아무것도 없는 빈 바탕에서 갑자기 발생되는 것이 아닌, 그동안 체득했던 기술들의 조합과 변형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거나, 기존에 존재했던 작품을 바탕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지점을 찾아내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마치 기나긴 모방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성인의 나이가 된 인물이 비로소 자신만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행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외에 어른스러운 행위를 규정하는 요소에는 문제해결 능력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또다시 반복된다고 하지만, 때로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존 질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갈등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런 순간은 비로소 사회의 도덕관이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도 할 것인데, 세대 간의 갈등과 분열은 내가 아는 한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언어라는 집합적 구조 속에서 ‘어른’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구별성은 ‘아이’와 다름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즉 ‘어른’이라는 단어가 온전하게 구별되고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아이’라는 상반되는 존재(단어)가 필요하다.

따라서 ‘어른’이라는 단어의 규정에는 자연스럽게 ‘아이가 아님’을 내포하고 있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세대의 분할과 갈등의 존재 가능성을 내재한다.


연결지어 생각해 볼 때,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행위에는 어떤 식으로든 세대에 관한 의미가 자연스럽게 포괄되어 있고, 어른은 그 의미상 ‘기존 질서’ 측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세대 간 갈등이 발생했을 때, 위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어른스러운 행위가 무엇인지 규정해 본다면, 기존의 질서에 대한 모방훈련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질서와의 갈등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하는데, 아마도 그 능력의 원천은 창의성과 개별성(고유성, 독창성)에서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개별성(고유성, 독창성)이란 모방의 범주에서 벗어나, 타인과 자신의 존재를 세심하게 구별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다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기 자신의'취약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다름에 대한 이해로부터 파생되는 공감능력 등의 철학을 보유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른의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가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거기에 더욱더 무게를 두게 되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미 실재를 초과한 시뮬라크르에게는 더 이상 그보다 더 정확한 참조물이 없기 때문에 결국 실재는 시뮬라크르에 재배된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중에서 -

 오래전부터 사회는 ‘어른’이라는 표상을 내세워 개별자들에게 도덕을 전파해 왔다. 그런데 자주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누가 어른을 규정했는가?”

호모 사피엔스가 인지혁명을 겪고 있을 무렵에도 여전히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존재는 있어왔지만, 그러한 선후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굴하여 어른이란 관념을 규정하기 시작한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날 신성한 존재가 나타나 “이 순간부터 어른을 규정한다!”라는 계시가 내려온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고작 법률에서 정한 나이가 차면 성인으로 인정한다는 상식수준 외에, 누군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 사람도 없지만, 예로부터 내려온 가르침이라는 상투어와 함께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관념은 대를 이어가며 작금에도 여전히 모방되고 있는 것만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명확한 근원도 알지 못한 채로, 어떻게 자신을 어른이라 간주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 공허하지 않는가.


살면서 어른이라는 관념에 공허함을 느꼈던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어릴 적 전능한 줄로만 알았던 부모가 어느 날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한낱 범인에 불과했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조차 욕망이나 도덕성이 취약했음을 마주한 순간, 또는 그러한 타인을 목도할 때…

매번 겪을 때마다 어른에 대한 회의와 공허함은 차곡차곡 누적되어 간다.


어느덧 나도 속칭 ‘꼰대’라고 불려질 만한 나이가 되었다.

여전히 어른이란 관념에 회의와 공허함은 점점 커져가고 있지만, 동시에 제 발 저린듯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자주 돌아보기도 하는데,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꼰대는 맞을지도 모르나, 그 중에서도 최고라고 생각되는 ‘근엄한 꼰대’까지는 아닌 듯하여 그나마 안심하는 처지다.

하지만 스스로 꼰대가 아닐까에 대한 고민은 끝까지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힐 듯 하고,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꼰대’라는 개념이 ‘어른’과 이웃한 단어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음과 양의 전담하는 단어라 생각하기 때문에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꼰대’는 일종의 권위주의를 나타내는 상징어로서 본 뜻은 나이를 불문하고 권위적인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권위를 앞세워 타인을 대하는 경우는 대체로 연장자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상황이 가장 흔하기 때문인지, 일상적으로 꼰대라고 불려지는 경우는 보통 나이가 많은 자를 비하하는 멸칭일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꼰대’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

내 생각에는 표상적인 어른에 대한 무지성적 모방과 동시에 타인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의 콜라보가 아닐까?

거기에다 주체로서의 개별성을 온전히 갖추지 못해서 희박한 자존감으로 인하여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채워야만이 자신의 온전한 멘탈을 유지하는 무리한 인정욕구로부터 발화되는 언어,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공감은 뒤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들이 행위하는 근원은 결국 변별력 없이 모방만을 반복한 결과물일 것이며,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버려서 자신 이외에 더이상 참고할 어른이 없는 상태에 이른 자가 바로 '꼰대'일 것이다.

즉 과잉된 모방행위로 인해 참조해야 할 외적 대상마저 제거되어, 스스로를 순환참조하여 어른이라는 스스로 어른이라는 권한과 권위를 부여하여 어른의 행세를 반복한다.

결국 스스로 어른이라 칭하는 꼰대가 구축한 '어른의 표상' 속에는 주체성은 거세되고, 오로지 '타자성'으로 점철된 모방으로 채워진 공허함일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취약성을 절대 드러내지 않고 숨겨야만 하는 ‘근엄함’까지 더해진다면, 이 이상으로 완벽한 꼰대는 없지 않을까?


어른과 꼰대. 이 둘의 공통된 특성에는 틀림없이 모방이 기초할 것이라고 본다..

모방은 우리가 삶의 양식을 터득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임은 자명하지만, 일찍이 플라톤 선생이 시인들의 추방을 주장했던 것처럼, 신의 말씀을 1차로 모방한 최초 사본, 그리고 또다시 그것을 시인이 모방하는 과정에서 2차, 3차로 왜곡하여 전파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태어나 언젠가는 어른으로 산다.

하지만 그런 '어른'이라는 개념은 마치 동상이몽처럼 하나의 단어로 되어 있지만, 사람마다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 지는 각자의 선택이 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언제나 머릿속에 떠올리는 ‘어른’이라는 그 본질적이고 진실된 어른스러움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적 모방 사이에서.. 모방의 모방으로만 점철된 공허가 되지 않도록 개별성(주체성)을 잊지 않아야 함은 기억해 두면 좋지 않을까?

 나를 포함하여...

...라는 생각을 끝으로 오늘의 내가 가진 얕은 수준의 정리를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망록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