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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고 Mar 30. 2024

8월의 크리스마스

[이질의 교차점]

 라디오와도 같은 영화가 몇 있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장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음파만으로 심적 안정을 주는 일종의 백색소음(white noise)과도 같은…

나에게 그런 영화는 친절한 금자씨나 올드보이, 러브레터, 봄날은 간다, 중경삼림 등이 그러하다.

이 영화들은 다른 작업에 집중하기 위한 일종의 촉매로써 하염없이 틀어놓곤 하는데, 최근 그림을 그리면서 적당한 백색소음으로 골라 집어든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이리하여 다시 보게(듣게)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담은 아련한 사진 한 장을 보는 것처럼 여전히 그러했고, 영화의 여운을 남겨 몇 글자 적어둔다.




 영화나 음악은 물론이고 수많은 문화/예술작품에는 사람마다 나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 작품마다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는 연령이나 필요한 만큼의 삶의 경험치가 필요하다고 믿는 편이다.

예컨대 개인적 경험으로는 스물이 갓 지난 나이에 보았던 영화 ‘봄날은 간다’의 경우 대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고, 재미는 어찌나 이리도 없는지 툴툴거리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낭비된 시간에 대한 불만 만이 가득했으나, 세월이 지나 나이와 경험이 더 쌓이고 난 뒤 다시 보니, 과거와는 반대로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표현에 감탄하거나, 영화가 끝난 뒤에 남겨진 아련함에 잠시간 넋을 놓던 기억이 있다.


그 비슷한 경험과 결을 가진 영화로서 ‘8월의 크리스마스’는 20세기의 끝자락인 98년도에 개봉하여 어느덧 흐르는 세월의 관성에 떠밀려 이제는 조용한 라디오(?)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흘끔 한 장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영화 속의 색채와 공기가 화면 밖으로 불어드는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교차되는 이질(異質)


- 이질. 첫 번째 [일출과 일몰]


 ‘8월의 크리스마스’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이질을 표상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여름의 한 중간 ‘8월’과, 겨울의 대명사로 모두가 인식하는 ‘크리스마스’가 하나의 제목 속에 맞닿아 배치된다.

영화는 시작하는 순간 이질을 교차한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주인공 ‘정원’(한석규 분)은 일몰에 다다른 삶을 남겨둔 시한부다. 자고 있는 그의 방 창문으로 일출의 눈부신 빛과, 방학이 끝나 새 학기를 시작하는 활기찬 개학식의 구령에 의해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파릇한 아이들은 벌써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지만, 정원은 그를 내리누르는 햇살의 중량에도 여전히 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피곤한 얼굴로 눈을 뜬다. 시한부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장면은 계속해서 이질을 교차하는데, 힘없이 병원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정원은 자신과 대립되는 건너편의 아이와 잠깐의 교감을 하거나, 더 이상 어른들은 하지 않을 법한 철봉에 아이처럼 매달려 애써 남겨진 삶의 무료함을 달래곤 하는데, 그런 그의 뒷모습은 마치 삶을 꿈꾸며 죽어가는 ‘어른 아이’를 떠오르게 한다.


- 이질. 두 번째 [간절함과 지겨움]


 정원은 부친의 가업을 이은 동네 사진사로서 부친이 운영한 사진관을 그대로 이어나간다. 그가 운영하는 ‘초원 사진관’은 유리창 속으로 내걸린 사진들처럼 시간의 이름 속에 빛이 바랬지만, 흑백의 사진에 담긴 정원의 첫사랑은 사진을 찍었던 시절만큼이나 시간 속에서 영속하다.

하염없이 영속한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림’(심은하 분),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사진 속 인물만큼이나 젊고 생기 있으며, 그녀의 하루는 순간을 재빠르게 포착해야만 하는 불법주차 단속원으로서 사진을 찍으며 일상을 살아간다.

사진이라는 공통된 일상을 가졌지만, 동질이상인 두 이질적 인물의 교차는 첫 만남부터 선명하게 충돌하는데, 이제 막 병원에서 돌아와 더위에 지쳐 잠시 기다려 달라는 정원, 그런 정원을 무시하고 단속한 차량사진을 최대한 빠르게 현상해 달라고 촉구하는 다림 사이에서 약간의 감정적 충돌이 일어난다.


정원과 대립적인 그녀는 “지겨워”라는 말을 버릇처럼 반복하지만, 마치 흘러가는 시간을 처절하게 붙든 듯 모든 것이 늘어진 정원에게는 그녀의 그런 불평 섞인 언행마저 박동하는 생명의 파동처럼 정겹게 들린다.  


- 이질. 세 번째  [소유와 무소유]


 다림을 기다리며 귤 두 알을 산 정원, 그런 정원을 보며 바보처럼 왜 넉넉하게 사지 않았냐며 놀리는 듯 표정 짓는 다림은 자신의 의지대로 귤을 추가로 구입한다.   

모든 겨울을 소진해 버린 동물이 더 이상 겨울잠을 위한 준비가 필요 없듯이, 정원에게는 의지보다는 그저 순간이 소중할 뿐, 애써 여분을 남겨둘 필요는 없을 게다.   


- 이질. 네 번째 [~하기 위함, ~주기 위함]


 정원에게 남은 시간의 대부분은 ‘하기 위함’이 아닌, ‘주기 위한’ 시간이다. 그는 한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찍어 주거나 자신을 기억할 친구들을 위해 단체사진을 찍어 주었고, 자신의 부친을 위해 리모컨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마지막으로 다림을 위한 사진과 편지를 남겨 둔다.

반면에 다림은 대책 없이 남아있는 자신의 삶을 채우기 위해 행위한다. 정원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사진관을 찾고, 때로는 흐르는 마음에 따라 정원과의 약속 시간을 어기거나, 또는 함께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녀의 삶은 자신의 의지로 채워야 할 무수한 시간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 이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정원에게 편지를 쓰고, 정원은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다림을 위해 그녀의 사진을 남긴다.


다림은 하기 위해서, 정원은 주기 위해서...


조합, 그리고 그 조합의 또 다른 이질적 대립


 ‘이질’ 혹은 ‘다름/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각자 존재하는 의미와 방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 게다.

이 영화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죽음과 삶’은 언뜻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이질이 대립하는 것으로 비치지만, ‘대립’이라는 언어의 양식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둘 이상의 체계가 필요하듯,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말하고, 죽음을 구분함으로써 삶이 구분된다. 이처럼 대립하는 두 존재는 사실 이질동상의 관계로 개별적인 방식으로써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존재 방식이 다른 두 존재가 뒤엉키며 고유한 마찰음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마치 음계의 차이가 멜로디를 만들 듯, ‘조합’이라는 것은 이질적인 두 체계가 이전에는 가지지 못한 또 다른 형식의 발생이다.

영화에서처럼 죽음을 목전에 둔 정원과, 감당되지 않을 만큼 기나긴 삶을 남겨둔 다림이 단지 불협화음만을 내지 않고 그들 만의 색다른 조합으로 만들어 낸 공명음이 관객의 마음속에 어떤 감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화는 정원의 시선을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에 가깝기 때문에,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필름이 감광되듯 서서히 정원의 죽음 속으로 수렴되어 간다. 하지만 정원이 그렇게나 느리고 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 살고 싶어 하는 그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 모르겠다.

계속해서 살고 싶기 때문에 시간을 늘리고 가능한 지루하게 행동하며 하루를 이틀처럼 살고 싶지만, 그런 정원의 마음에 대한 대립적 역할로서 다림이 나타나고 정원의 시간은 그렇게 균형이 맞춰진다.

이질적인 두 존재는 한낮의 더위 속에서 건넨 아이스크림처럼 다른 성질의 조합으로서 특별한 감정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이것은 죽음에 의연했던 정원의 마음에 결국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 낸다.

조합에 의해 생성된 것조차, 그것에 또 다른 이질적 대립이 있는 것이다.


결국 정원은 남은 시간을 모두 소진하고 드넓은 초원으로 돌아간다. 한 사람의 ‘생’이라는 거대한 서사가 마침내 ‘멸’로써 완전한 대립과 완전한 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겨울을 맞이한 다림처럼 우리 역시 남아있는 생애에 걸쳐 수없이 많은 이질을 만나고 대립과 조합을 이루며 살아갈 것이지만, 그 숨 막힐 듯 끊임없는 반복의 서사 속에서 우리가 잠시나마 숨통을 틔우며 남겨 둘 만한 것이 있다면, 그러한 시간들을 지나 살아왔다는 하나의 증명으로서 남겨 둔 '사진 한 장'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다림을 미소 짓게 했던 한 장의 사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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