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자기기만적 창작 행위>
가끔씩 그림이 화가로부터 도망쳤거나, 화가가 끝내 놓쳐버린 그림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림을 그리기 전,
처음 펜을 드는 순간의 머릿속에는 대략 완성에 관한 어떤 심상을 가진다.
그것이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일종의 예감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데, 그리다는 동적 행위로써 그 심상을 실체화하다 보면 실제 그려지고 있는 그림과, 머릿속의 그림이 과연 얼마나 일치해 나가고 있는가는 사실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계획에 없던 습작이라면 더욱 그렇다.
단지 무엇인가를 그려야겠다는 욕망만으로 시작한 이 그림 역시 처음 의도와 관계없는 그런 그림이 되고야 말았다.
마치 생각이라는 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어딘가에 달라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방향성이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펜 끝이 마음대로 화폭에 달라붙어 그려지기도 한다. (나로서는 거의 매번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나의 손끝으로부터 새어 나왔지만, 어쩌면 내가 그린 그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