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호] 예감과 초장기기억으로서의 교지

커버스토리

by 성균지

편집장 최다원



대학 교지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사유와 목소리를 담아내는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매체이자 살아있는 기록물이다. 1946년 창간된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 교지 성균지는 지난 80여 년간 학생 자치 언론으로서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 성균지는 학내의 지배적 담론에 도전하며 학생들의 다양한 경험과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는 대항적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했고, 이러한 역할은 성균지가 단순한 학내 소식지를 넘어선 독자적인 위상을 지니는 매체임을 시사한다. 이처럼 성균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학생들이 남긴 다양한 ‘잔상’들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과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 속에서, 오늘날의 성균지는 다시금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지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새로운 시대에는 언제나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무(無)에서 탄생하지는 않는다. 프랑스혁명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그 모범을 찾았듯, 우리 역시 낯선 미래를 헤쳐가기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사유의 자원, 창조적 계승의 모범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그 모범을 우리 학교 독어독문학과 이호성 교수의 두 논문[1] 속 독일 문학 이론에서 찾고자 한다. 이는 교지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그 방향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이기도 하다.


1.함께 말하기 위한 언어들


[공술계 - 함께 이야기하기 위한 지평]


교지 및 학생언론은 흔히 학생사회에서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때 말하는 공론장이라는 표현 자체가 엄밀히 말해 잘못된 번역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가 학생언론의 기능과 의미를 질문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즉, 공론장이라는 기존 번역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본래의 개념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교지라는 매체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 또한 근본적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

공론장으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는 독일어 ‘Öffentlichkeit[외펜틀리히카이트]’는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저서에서 사용되어 널리 알려진 개념으로, 시민사회 내부의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토론 공간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18세기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나타난 살롱이나 커피하우스와 같은 모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모임에서 시민들은 이성적·비판적 토론을 펼치며 공동의 관심사를 논의하였다. ‘Öffentlichkeit’는 국가 권력이나 시장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개방된 영역이며, 그 형태는 시대의 수용에 따른 변화에 항상 열려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동아시아로 건너와 공공권, 공공영역, 공론장 등으로 번역되며 ‘공(公)’이라는 글자에 갇혀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공동체의 것과 국가 권력을 구별하지 않는 유교적 전통 속에서 ‘Öffentlichkeit’의 번역어들은 어느덧 개방성, 변화 가능성 등의 성질을 잃고 ‘공식적’, ‘행정적’, ‘권위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말로 굳어졌고, ‘공공성’은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국가나 언론, 전문가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호성 교수는 이러한 한계를 비판하며 새로운 번역어 ‘공술계’(共述界)를 제안한다. 공술계는 단지 새로운 말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지평을 되찾기 위한 개념적 전환이다 ‘공(共)’은 위계적 질서가 아닌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뜻을 담고 있고, ‘술(述)’은 말하기와 쓰기, 다시 말해 소통의 모든 형식을 포괄한다. ‘계(界)’는 특정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함께 꾸리는 이야기의 세계를 상징한다.

공술계는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더 나아가, 오스카 네크트와 알렉산더 클루게가 비판적 보완의 개념으로 제시한 ‘프롤레타리아적 공술계’, 즉 기득권 바깥의 말들, 소외된 경험들, 환상성을 가지는 서사들까지 포괄한다. 여기에는 고요한 삶의 내밀한 경험부터 가짜뉴스로 넘쳐나는 인터넷 속 찰나의 언설까지 다양한 현실들이 얽혀있다. 다시 말해 공술계는,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누구와’ 말하는지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장소이다.

공술계는 단지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다고 해서 자동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들이 서로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속되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의 말이 사라지지 않고 내일의 기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말들을 엮고 저장하는 매개가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이 공술계의 핵심 장치로 떠오른다. 하버마스에게 문학은 시민의 내면성을 공술계로 내어놓으며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수단이었다.

문학은 단기적인 뉴스나 정치 담론이 놓치기 쉬운,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할 이야기들을 다룬다. 그것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기 어려울 때,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표현하게 해준다. 특히 비유, 환상, 은유와 같은 형식을 통해 감정과 현실을 엮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한다. 문학은 우리가 누구였고 무엇을 겪었으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전하고 기억하기 위한 공술계적 실천이다. 그리고 이 문학의 공술계적 가능성을 가장 선명하게 실천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클루게다.


2. 예감과 초장기기억으로서의 문학


독일의 작가이자 영화감독, 방송 프로듀서였던 알렉산더 클루게에게 문학(넓은 의미에서 영화, TV 작업 등 다양한 매체를 포함)은 단순한 오락이나 허구를 넘어선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클루게는 사회적 재난이나 역사적 트라우마와 같은 근원적인 경험을 가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문학을 바라본다. 이호성 교수의 클루게 관련 논문에 따르면, 클루게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라는 ‘끝나지 않은 과거’이자 ‘잊고 지내는 현재’를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방식을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는 사고 10년 이후에야 이를 다루는 시도를 통해, 성급한 뉴스로 인한 공황 반응이 아닌, 공술계의 관심을 이성적인 수준에서 다시 불러내려 한다. 클루게는 동시대인과 후손들에게 ‘경험의 전달’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이 점이 그의 다양한 다매체 활동을 단순한 저널리즘과 구분 짓게 하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과 공술계의 관계에 대한 그의 독특한 생각을 보여준다.


클루게의 문학은 사건의 피상적 기록을 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감’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또한, 문학은 공식적인 역사 기술이나 단기적인 뉴스 보도에서 망각되기 쉬운 인간적 경험과 사회적 모순을 세대를 넘어 전달하는 ‘초장기기억’의 매체가 된다. 이호성 교수는 ‘경험의 전달’이 중요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공론장이 시의적인 사안에 대한 토론에 강한 반면 공술계는 공동체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 세대뿐 아니라 과거 세대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세대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경험의 전달은 공동체의 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이며, 기존 언론이 당장 소비되고 잊히는 뉴스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문학은 체르노빌 사고와 같이 수십만 년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원히 지속되는 재앙’과 같은 일에 대한 긴 시선과 안목을 제공하며 그 주목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클루게가 말한 ‘뷔히너적 방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게오르크 뷔히너가 잡지 기사 한 줄에서 착안한 <보이체크>라는 문학을 통해 잊히기 쉬운 개인의 비극과 그 배경의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어 ‘계속 새로 쓰일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든 것과도 상통한다.


클루게는 체르노빌의 문학적 형상화 방법으로 신화와 동화, 고전 문학을 이용한다. 예컨대 그는 쉴러의 발라드 <잠수부>를 차용해, 체르노빌 원자로 내부를 수리하러 들어간 실존 인물 아나넨코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때 쉴러의 고전은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현실을 비틀어 보여주는 렌즈가 된다. 살짝 어긋난 비유와 해석을 통해 클루게는 현실의 균열을 드러내며, 또한 독자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또한 그는 단순히 리얼리즘적인 방법만으로는 체르노빌과 그 이후의 사태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실의 환상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치’와 같은 것이며, 이는 실제가 아닌 ‘환상성’을 지닌다. 문학은 이러한 ‘환상성’을 탐색하고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예: 체르노빌과 같은 재앙)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면 무기력함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일종의 ‘막’을 만들어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생존 본능에서 나온 인간의 문학적 본능과 연결된다.


클루게는 이런 방식으로 체르노빌이라는 재난을 ‘잊히지 않는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이 이야기는 학문과 저널의 경계를 넘는 형식으로 인류의 집단적 초장기기억을 생성, 저장하고 더 나아가 다가올 재앙에 대한 예감처럼 기능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적 활동은 함께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지평으로서의 공술계와 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공술계는 잊힌 말들, 사라지는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이야기의 지평이며, 문학은 그 지평을 펼쳐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매개 중 하나다. 클루게가 문학을 통해 트라우마적 사건을 초장기기억의 방식으로 보존하고 그것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실천을 이어갔듯, 우리 학생사회 역시 공동체의 기억과 목소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직접 말하고 쓰는 대학 교지는 이러한 공술계적 실천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오늘날의 성균지가 지닌 가능성을 점검하고자 한다. 공론장이 아닌 공술계로, 단기 기억이 아닌 초장기기억의 매체로서 교지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겠다.


3. 예감과 초장기기억으로서의 교지


성균지는 1946년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 교지로 창간된 이래 80여 년간 학생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왔다. 그간 성균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운동권의 정치적 교지, 비판적 담론의 장, 학생 문화의 기록자라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이는 단순한 학내 소식지 이상의 정체성을 구축하게 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SNS 기반 담론 생태계의 변화 속에서, 성균지는 점점 더 그 존재 의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교지가 과거와 같은 정보의 전달자나 운동의 기관지가 아닌, 말들이 엮이고 기억되는 공술계의 장치로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우선 공술계의 개념은 성균지의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되묻게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공론장은 시의적이고 토론 중심의 기능을 중시하는 반면, 공술계는 경험의 층위를 따라 기억을 지속시키는 기능에 초점을 둔다. 이 개념을 성균지에 적용하면, 교지는 단순히 지금 여기의 사안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서, 공동체 내부의 말들이 서로를 향하고, 서로를 기억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즉, 어떤 사건이나 사안이 보도되고 기록되는 것을 넘어, 그것이 다시 말해지고 다시 기억되도록 서사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방향은 단순히 편집의 형식이나 글쓰기의 방식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균지라는 매체가 수행하는 윤리적·문화적 책무의 차원을 새롭게 설정하는 일이다.

이때 클루게의 문학적 작업 방식은 실천의 방향에 통찰을 제공한다. 클루게는 사회적 재난을 ‘예감’하고 이를 ‘초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문학의 힘을 강조했다. 성급한 뉴스와 피상적 담론이 반복되는 오늘날의 환경 속에서, 성균지는 바로 그 ‘뒤늦게 시작하는 이성적 주목’을 조직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체르노빌이라는 재난을 10년 뒤에야 형상화한 클루게처럼, 교지는 잊힌 사건이나 묻힌 감정들을 끌어올리고, 그것을 재구성해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기사는 더 이상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기 위한 정보의 단순 보고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공술계적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그것은 사건을 형상화하는 새로운 틀이며, 단절된 경험을 다시 이어 붙여 전달하는 기억의 실천이 된다.

성균지가 ‘예감과 초장기기억’의 매체로서, 그리고 학생사회의 공술계로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잔상의 심층적 기록:

성균지의 이번 커버스토리 키워드 ‘잔상’은 단지 과거의 흔적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클루게가 말한 ‘끝나지 않는 과거’처럼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며 미래의 감각을 구성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이호성 교수는 클루게의 문학적 작업을 통해, 기록은 단순히 저장의 행위가 아니라 ‘예감과 의미화’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성균지가 담아야 할 잔상은 과거의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학생들의 감정과 사고 속에서 재형성되고 있는 사회적 기억들이다. 학내 사건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시스템에 대한 막연한 불안, 시대적 전환기에서의 희망과 절망 같은 감정은 SNS의 피상적 담론 구조 속에서 소멸되기 쉽다. 그러나 교지는 이를 다르게 다룰 수 있다. 성균지는 이러한 감정적·정서적 잔상들을 포착하고 다층적으로 엮어냄으로써, 당대를 뛰어넘는 ‘초장기기억’의 편집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 이는 곧 공술계로서의 성균지가 수행할 가장 근본적인 책무이기도 하다.


시의성의 확장된 이해:

주간, 월간 단위로 발행되는 신문 등의 매체와 달리, 성균지는 학기에 한 번 발행되는 잡지이다. 이는 즉시성에서는 불리하지만, 심화된 내용과 장기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다는 대체 불가능한 큰 장점이 있다. 이호성 교수가 ‘보이체크’가 오늘날에도 읽히는 것처럼 다른 시의성을 가질 수 있음을 언급했듯이, 성균지는 단순한 속보를 넘어 초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이야기, 현재의 정의를 확장하는 통찰력 있는 글을 담아야 한다. 클루게의 관점에서 ‘현재’는 100년 이상 떨어진 과거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과거의 잔상들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성균지는 당장의 반응성보다는 ‘지속될 수 있는 시의성’을 고민해야 한다. 예컨대 학내 사건 하나를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수년 뒤에도 여전히 학생들의 기억 속에 남아 의미를 갖도록 만드는 편집 전략이 필요하다. 이러한 확장된 시의성이 클루게의 문학론이 지면에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이다.


플랫폼 확장:

성균지가 ‘예감과 초장기기억’의 매체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클루게가 언급했듯이 ‘적극적인 독자’가 필수적이다. 문학 및 매체가 제시하는 환상성을 독자가 받아들이고 스스로 빈틈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클루게의 작업 역시 영화, 책, TV 등을 활용한 다매체 전략으로 공술계의 지속성과 다양성을 가능케 했다. 성균지 역시 인쇄물에만 갇히지 않고,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하여 노출 빈도를 높이고 참여를 촉진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확산’이 아니라, 학생사회가 말하고 응답하는 지형을 넓히는 일이다. 독자에게 말이 닿는 방식이 다르면, 그 말에 대한 응답의 양상도 달라진다. 웹사이트, 인스타그램,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학생사회와의 상호작용을 실현하고, 교지의 문장들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타 대학 교지와의 공동 기획, 연재, 아카이빙 협업 등을 통해 각 대학 사회의 잔상들을 한데 모아 공술계의 연합 구조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시도는 단지 외연의 확장일 뿐만 아니라, 경험을 전달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현실적 장치이며, 독자와 함께 말하고 엮어가는 공동의 초장기기억을 형성하기 위한 실천이 된다.





교지를 만든다는 것은 단지 한 권의 책을 엮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학생들의 감각과 사유, 그리고 형상화되지 않은 말들까지 조심스럽게 수집하고, 잊히지 않도록 구조화하는 작업이다. 이 모든 과정은 곧 공동체의 기억을 엮어내는 실천이며,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편집된 예감의 기록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당장의 반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쓰여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성균지가 공술계로 기능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감각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 말할 수 없었던 것들, 그리고 말해야만 했던 것들을 써내려가겠다는 약속이다.

교지는 때로는 무력해 보일지 모른다. 급변하는 담론 생태계 속에서 학기 단위로 발행되는 이 책은 너무 느리고, 너무 조용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지를 통해서만 가능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서두르지 않고 오래 머물며 쓰인 글, 재빠르게 사라지지 않는 문장, 한 세대가 지나도 다시 꺼내어 읽힐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성균지가 단기적인 반응의 매체가 아니라, 예감과 초장기기억의 매체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그리고 훗날, 다음 세대의 구성원이 이 문장들을 다시 펼쳐볼 때, 지금의 우리의 말과 생각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교지를 만드는 이유다.


[1] 『공술계(共述界) - 함께 이야기하기 위한 지평: 외펜틀리히카이트 Öffentlichkeit의 동아시아 번역어에 대한 비판적 고찰』, 『예감과 초장기기억으로서의 문학: 알렉산더 클루게가 바라본 체르노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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