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 사례: 지하실의 거주자, 세주

인생철학 설계방법론의 실제 적용 사례를 위한 샘플 채취

by 백세주

세주를 소개하며

이 이야기는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기록입니다. 다만 개인의 신변 보호와 서사의 완결성을 위해 시간대나 구체적인 사건, 상황 등은 상당 부분 각색되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여기, 우리가 관찰할 하나의 샘플인 세주가 있습니다.

S대 전자공학 박사과정 2년 차에 재학 중인 20대 후반의 남성 세주는 부모님 집에서 거주하며 변변찮은 수입으로 생활하는 평범한 대학원생입니다. 세주의 일상은 연구실과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흐름 속에 있지만, 그 내면에는 해결되지 않는 여러 버그가 쌓여 있습니다. 세주는 혼자 집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시간을 좋아하며 종종 폭음을 하기도 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 묘한 공포심을 느끼며, 연구실에서는 교수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자주 시달립니다.

그는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다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감정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배우는 도덕 시간에, "감정이 사라지면 어떨까"라는 질문에 "슬플 것 같다"는 정답 대신 "감정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슬픔을 느낄 수 있죠? 아무 느낌도 안 들 것 같다"는 논리적인 답을 했다가 선생님께 크게 혼이 났던 기억은 여전히 그에게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패배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즐거움과 난해함 사이에서

세주는 전자공학 설계라는 자신의 전공이 적성에는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논리적으로 회로를 배치하고 의도한 대로 신호가 흐르는 것을 보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연구'라는 업의 실체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습니다. 공학적 엄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과정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이어야 했고, 그 지루함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고독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혼자서 전자회로를 설계하고, 수천 번의 검증 과정을 거치고, 직접 도면을 그려 PCB 기판을 제작하고, 연기 나는 인두기를 들고 밤새 납땜질을 하는 과정은 오롯이 세주 혼자의 몫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고, 그 고생의 결과물이 실제 세상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논문을 써서 실적을 쌓고, 산학과제나 정부과제의 정산 자료를 만들기 위해 서류 더미에 파묻히는 나날이 반복되었습니다. 언제쯤 이 터널을 지나 졸업이라는 종착지에 닿을 수 있을지, 미래는 안개처럼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연애 또한 세주에게는 풀리지 않는 난제였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열정적으로 다가가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상대에게 거절당했을 때 입을 내면의 타격이 두려워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가끔 세주의 매력을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나타나 먼저 손을 내밀어 줄 때는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 관계 속에서도 세주는 여전히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상대가 곁에 있어도 진정으로 이해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자, 세주는 점점 연애에 소홀해졌습니다. 결국 상대가 지쳐 헤어짐을 고하면 그는 "그러려니"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슬픔조차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는 기계적인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문득, 사무치게 외로움이 밀려올 때면 그는 밤새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차갑게 식은 방 안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은 연산 오류를 일으킨 시스템의 비명과도 같았습니다.

신체적인 관리 역시 세주에게는 또 다른 전장이었습니다. 그는 체중이 느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여 매일 샐러드를 먹으며 식단을 조절하고, 주 3회 꾸준히 운동을 병행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반복되었습니다. 1년 더 늦게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금방 실력이 늘어 본인을 추월하는 상황을 자주 목격하였습니다. 운동 능력과 체형 관리에 있어 세주는 철저한 투입 대비 산출 효율이 극도로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도 성과는 더디기만 했고, 조급한 마음에 강도를 높이다 보니 무릎과 어깨에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며칠을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할 정도의 부상은 그의 생활 리듬을 완전히 망가뜨렸고, 운동을 쉬는 동안 불어나는 체중을 보며 다시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다이어트 약 같은 외부의 도움을 받아보고 싶었지만, 대학원생의 형편으로는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노력해도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손상만 입는 자신의 신체 시스템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습니다.

예술과 철학이라는 도피처

버거운 일상과 식어버린 연애의 허망함 속에서 세주의 유일한 낙은 영화였습니다.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 스크린을 통해 수많은 인물들의 세계를 만나는 것을 즐겼습니다. 특히 그는 주인공들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며 변화해 나가는 모습에 깊이 몰입하곤 했습니다. 사랑이나 인간적인 연대를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사투를 지켜보며 세주는 남모를 눈물을 자주 흘렸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껴안는 장면에서 세주는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수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이 가슴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방 안의 불을 켜는 순간, 그 모든 감동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영화는 끝났지만 현실의 세주는 여전히 혼자였고, 스크린 밖의 세상은 단 한 걸음도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위안은 잠시였고, 남겨진 고립감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습니다.

영화가 주는 감성적 위안만으로 부족함을 느낄 때쯤 세주는 다시 책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만난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에게 거대한 구원이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와 고통을 단련의 계기로 삼으라는 니체의 일갈은 지하실에 갇힌 세주에게 전율을 선사했습니다. 비참한 자신의 현실조차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구쳤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책을 덮고 연구실로 복귀하는 순간, 니체의 숭고한 사유는 현실이라는 콘크리트 벽 앞에서 힘없이 흩어졌습니다. 고통을 긍정하라는 말은 아름다웠지만, 당장 오늘 밤 부모님과의 마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감당하기 어려운 연구 과업을 어떤 순서로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철학은 그에게 태도를 가르쳐주었지만, 정작 인생이라는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매뉴얼은 빠져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그는 고결한 문장들과 비루한 일상 사이의 괴리 속에서 더 깊은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

상태가 악화되자 세주는 학내 심리상담센터를 찾았습니다. 상담을 통해 세주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풍부한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자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편해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상담은 그에게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논리적인 패치를 제공해 준 셈입니다. 또한 명상과 호흡법은 신체적인 긴장을 잠시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상담 회차가 늘어날수록 세주는 근본적인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사회적 기술은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나,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의 목록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연구 업무, 운동, 친구들과의 약속, 가족들과의 시간 등 수행해야 할 과업의 양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그에게 깊은 절망감을 줍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에너지를 소모하는 과제들인데, 정작 에너지는 고갈되어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세주는 정신건강의학과 방문도 고려해 보았습니다. 주변에는 이미 장기간 병원을 다니며 약을 복용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지켜보며 세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오래도록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고통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기보다는 그저 약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지속적인 진료비와 약값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또한 향후 취업 시 진료 기록이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세주는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다시 혼자만의 술상 앞에 앉았습니다.

삶이라는 문제를 푸는 또 다른 방법

세주는 지금 막다른 길에 서 있습니다. 영화와 철학은 모호했고, 상담은 일시적인 완화제였으며, 운동은 부상이라는 에러를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시도한 방법들은 "왜 아픈가"에 대한 해석을 주었을 뿐, 제한된 자원 속에서 쏟아지는 과업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시스템을 정상화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가이드를 주지 못했습니다. 일상은 무너지고 있고 우울감은 수시로 고개를 듭니다. 세주는 이제 공허한 위로가 아닌,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해결책을 원합니다. 시간과 에너지가 제한된 상황에 쉴 새 없이 문제가 쏟아지는 이 상황에 세주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수만 수억 개의 변수가 충돌하고 있는 이 압도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대체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요?

저는 그 답으로, 앞으로 이 글에서 제안할 인생철학 설계 방법론을 세주에게 전달해보려 합니다. 세주라는 한 인물이 지금까지 가장 잘해왔고, 오랜 기간 수련해 왔던 설계방법론들을 그의 망가진 인생이라는 전자회로에 빗대어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제를 트랜지스터와 저항, 캐패시터에 해당하는 작은 단위 소자로 해체해 보고, 이를 전압과 전류라는 근본적인 동작 원리에 비추어 다시 바라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 어떤 학문도 내놓지 못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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