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의 학문, 공학

조용하지만 가장 유능한 해결사들

by 백세주
과학자는 이미 존재하는 세상을 연구하고, 공학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을 창조한다.
Scientists study the world as it is, engineers create the world that never has been.
— 시어도어 폰 카르만

주인공이 되지 못한 자들의 기록

우리는 스크린 속에서 특정 직업군이 어떻게 신화가 되는지 목격해 왔습니다. 대중 매체가 열광하는 서사의 주인공들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의사와 군인, 승리를 좇는 스포츠맨, 혹은 정의를 수호하는 법조인들의 이야기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들은 대개 평범한 일상을 넘어선 절체절명의 순간이나 거대한 운명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강렬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이라는 신체적 시련을 딛고 우주의 기원과 블랙홀의 신비를 탐구하는 고결한 구도자로 그려집니다. 그의 지성은 휠체어에 갇힌 육체의 고통을 초월하여 우주의 진리에 닿으려 하며, 대중은 그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지적 낭만을 발견합니다. <오펜하이머>도 이러한 신화를 비극적이고 웅장하게 그려냅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단순히 물리학자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는 거대한 힘을 손에 쥐고 번민하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로 박제됩니다. 거대한 시대의 파고에 휩쓸리는 와중에 그가 보이는 눈물과 침묵은 기나긴 러닝타임을 묵직하게 채워냅니다. 이들은 언제나 범인이 닿을 수 없는 고차원적인 서사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그들의 연구는 인류의 진보 혹은 멸망과 직결되는 거룩한 사명이 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명단 속에 공학자의 자리는 늘 비어 있습니다. 공학은 본질적으로 조용한 성공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성공은 기적으로 기록되고 변호사의 성공은 승소라는 드라마가 되지만, 공학자의 성공은 당연함이라는 무덤 속에 묻힙니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난기류 속에서도 추락하지 않고 정해진 좌표에 정확히 도착했을 때,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속의 반도체가 단 한 번의 비트 에러 없이 수십억 개의 데이터를 처리해 낼 때, 세상 그 누구도 그 뒤에 숨은 공학자의 사투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 다리, 멈추지 않는 서버, 폭발하지 않는 배터리는 대중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공학자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 그 모든 변수를 사전에 통제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완벽한 승리는 곧 지루할 정도로 평온한 일상으로 치환됩니다. 그렇게 공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편리함을 설계하고도, 정작 세상의 관심에서는 가장 먼 곳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대중문화가 공학자를 다루는 방식은 더욱 가혹하고 편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시트콤 <빅뱅 이론>의 '하워드 월로위츠'입니다. 그는 MIT 출신의 유능한 공학 석사이며 우주 정거장에 기기를 올릴 만큼 실력 있는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박사 학위를 가진 물리학자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무시당합니다. 천재 물리학자 '쉘든 쿠퍼'에게 고작 공학은 과학의 천한 하녀라며 조롱받고, 최첨단 변기를 수리하거나 우주정거장의 사소한 결함을 고치기 위해 쩔쩔매는 기술자 수준으로 희화화됩니다. 과학자가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고결한 질문을 던질 때, 공학자는 이게 왜 안 돌아가지라며 손에 기름때나 묻히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 이 사회가 공학을 바라보는 수준입니다. 물론 그들이 만드는 기술이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란 것은 부정되지 않지만, 결국 그들은 주인공이 아닌 배경을 수리하는 조연으로만 기억됩니다.

그렇습니다. 대중의 눈에 공학이란 아무리 가치 있어도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배경음악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만큼은 조연이 아닌 화려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주인공의 자리가 앞서 언급한 천재 과학자나 영웅적인 의사들처럼 평범한 개인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대단한 자격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감히 '오펜하이머'나 '스티븐 호킹'이 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루한 공학자의 삶을 동경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중은 가장 손쉬운 우회로를 찾아냅니다. 거창한 실력이나 객관적인 증명 없이도 누구나 즉시 주인공이라는 직함을 획득할 수 있는 곳, 바로 주관의 성소입니다.


주관의 성소와 객관의 전장

철학이나 심리학, 혹은 에세이로 포장된 수많은 자기 계발 담론들이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들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저마다의 주관을 담아 온갖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적 담론의 세계에서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이라거나 "당신의 마음이 곧 우주다" 같은 모호한 문장들이 지혜로 둔갑합니다. 문제는 이 영역에서 내뱉어지는 수많은 말들이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철학적 조언이 독자의 삶을 망쳐놓았다고 해서 그 철학자가 소송을 당하거나 자격이 박탈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해석의 영역이며, 틀려도 그만인 주관의 유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검증과 책임이 거세된 영역에서 발언의 무게를 결정짓는 '권위'는 지극히 자의적인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곤 합니다. 물론 정규 교육 과정을 거쳐 학문적 성취를 이룬 교수나 학자들의 권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업적은 엄격한 방법론을 거쳐 다듬어진 논리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공인된 권위의 울타리 너머, 최소한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이 오직 확신에 찬 목소리 하나로 무대 중앙을 차지하는 광경이 너무나 흔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가치관과 신념이 충돌하는 정치나 종교, 혹은 인생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상황은 더욱 가관이 됩니다. 이곳은 논리적 개연성보다는 팬덤의 크기나 자극적인 수사가 권위로 둔갑하는 무법지대가 되곤 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권위의 증표는 해당 분야에서의 직위와 경력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는 경력자입니다. 그렇기에 소위, 나이가 벼슬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너보다 나의 인생 경력이 더 오래되었기에, 전문적인 분석이나 깊은 성찰 없이도 본인의 생각이 곧 삶의 정답인 양 거들먹거리는 자들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조언은 대개 ‘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혹은 ‘시간이 약이다’ 같이 아직 나이가 들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결코 검증이 불가능한 문장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들의 주장은 들어맞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심지어 그 오류에 대한 책임을 질 의무도 없습니다.

반면, 공학자가 마주하는 세계는 단 1%의 주관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객관의 전장입니다. 나노미터급의 초미세 공정에서 수율을 잡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공학자에게 마음을 비우면 수율이 오를 것이라는 조언은 모욕에 가깝습니다.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기술이 더 유용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더 기분이 좋을 것 같은 선택을 해보라는 조언은 무책임 그 자체입니다. 잘못된 만들어진 반도체 칩은 그 누구도 구매하지 않는 악성 재고가 되어 수조 원의 생산 장비와 함께 의미 없는 고철 쓰레기로 전락합니다. 이곳은 실수가 곧 파멸이며, 어떤 화려한 수사로도 오답을 정답으로 둔갑시킬 수 없는 정직한 세계입니다. 공학자들은 이처럼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모호하고 무책임한 조언 뒤에 숨어 있을 때, 그들은 물리 법칙이라는 가장 가혹한 심판관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왔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풀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세계에서 단련된, 이 시대의 진정한 실전형 해결사들입니다.


최적의 엄밀함을 찾는 줄타기

공학의 합리성은 수학자나 순수 과학자의 그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수학자가 원주율의 소수점 아래 무한한 자릿수를 하나하나 끝없이 계산해내고 있을 때, 공학자는 고민합니다. '이 자릿수를 어디까지 계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 공학자에게 무조건적인 엄밀함은 곧 비효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다리를 설계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완벽한 안전을 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강철을 쏟아붓고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다면 그 다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겠지만, 그 다리를 짓는 데 드는 예산과 시간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영원히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자원을 아끼기 위해 계산의 엄밀함을 포기하고 대충 짓는다면 다리는 곧 무너져 비극을 초래하겠죠. 공학은 바로 이 극단적인 두 지점 사이에서 최적의 지점을 골라내는 학문입니다. 엄밀함은 비효율적이고, 부정확함은 위험합니다. 이런 제약 조건 속에서 공학자는 가용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냅니다. 수십만 년을 버텨낼 수 있는 압도적인 튼튼함은 조금 양보해도 괜찮습니다. 수백 년만 버텨내도 충분하니까요. 또, 조금 덜 튼튼하더라도, 발생 가능한 사고를 미리 예측하고 저렴하지만 효과적인 이중, 삼중의 대비책을 구축해 두는 게 더 합리적이겠죠. 이는 타협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제약조건을 돌파하기 위한 가장 고도화된 합리주의의 발현입니다.

공학은 그 지독한 합리성 때문에 타 학문이 정립해 둔 도구들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재배치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효과적이고 강력한 도구라도 이를 직접 발굴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과 자원은 또 하나의 비효율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렇기에 공학은 타 학문이 긴 시간을 바쳐 쌓아 온 고귀한 결과물을 온갖 문제의 전장으로 소환하여, 오직 해결만을 위해 사용되는 쓸모 있는 부품정도로 취급하곤 합니다. 공학자는 어떤 이론이 절대적 진리인지 증명하는 것보다, 그 이론이 내 목적에 유효한가에 집중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인류가 발명해 낸 수많은 공학적 성취들이 과학적으로는 정확하지 않다고 이미 밝혀진 이론이나 아직 완벽하게 해명되지 않은 이론들을 기반으로 탄생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며 뉴턴의 고전 역학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공학자들은 뉴턴의 수식을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빛의 속도에 근접하지 않는 지구라는 환경 안에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여전히 99.9% 유효한 설계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 틀린 법칙을 기반으로 초고층 빌딩을 세우고, 대륙을 잇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또 하나의 예로는, 유체역학의 핵심인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 있습니다. 이 방정식은 수학적으로 그 해가 항상 존재하는지조차 아직 증명되지 않은 밀레니엄 난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공학자들은 수학자들의 증명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천 번의 실험 데이터와 수치 해석 모델을 동원해 비행기의 날개를 설계하고 잠수함의 외형을 다듬었습니다. 원리가 완벽히 해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는 하늘을 날고 잠수함은 심해를 항해합니다. 증기기관의 발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선할 때, 열역학 법칙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습니다. 이론이 현실을 이끈 것이 아니라, 공학적 구현이 이론을 앞질러 세상을 먼저 바꾼 셈입니다.

두 세계를 잇는 정교한 가교

하지만 단순히 도구를 휘두르기만 해서는 새로운 가치가 생겨나진 않습니다. 풀어낼 문제가 마련되어 있어야 그 도구도 유용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의 경우에는 문제를 마련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이 풀 문제는 우주의 법칙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우주를 살며 마주하는 수많은 현상 중에 관심이 가는 것을 문제로 정의하고 그 원리를 해석해 내는 것이 수학과 과학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법칙이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기에, 그들이 풀 문제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 문제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풀어내게 됩니다. 반면, 인문학은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정의합니다. 각자의 해석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문제로 느껴지는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신은 선한가?'라는 질문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지만, 그 질문 속에 담긴 신의 형상과 선악의 기준은 저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결국 이 질문은 모두가 공유하는 객관적인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머릿속에서만 유효한 주관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문제를 풀어내는 문법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공학은 일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기술이기에, 이 극단적인 두 세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행복하고 싶다'거나 '편안하고 싶다'는 주관적 세계의 문제를 '에너지 효율'이나 '인장 강도' 같은 객관적 세계의 문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공학 연구에는 사람마다 비슷하지만 조금씩은 다르게 느끼는 온갖 필요들을 통합하여 수학과 과학이라는 도구로 풀어낼 수 있는 형태의 문제로 변환해 내는 과정이 늘 동반됩니다. 즉, 공학은 객관의 문법으로 풀어야 하는 딱딱한 이성의 학문으로만 오해되곤 하지만, 늘 주관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부드러운 감성의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풀려고 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관적인 문제 역시 공학적인 방법론을 적용하여 풀어내기에 부적합한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껏 시도되었던 여러 방법들에 비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죠.

기술이 인문학과 결합하고, 인간다움과 결합했을 때, 비로소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결과가 나옵니다.
It’s technology married with liberal arts, married with the humanities, that yields us the results that make our heart sing.
— 스티브 잡스

앞서 설명하였던 공학의 실용적인 태도와 연결 지어보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용해 보이는 온갖 도구들을 동원해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도구는 기존에 공학이 잘 사용하던 수학이나 과학이 될 수도 있지만, 철학이 될 수도, 인문학이, 또는 심리학이 될 수도 있겠죠. 뉴턴의 역학이 우주의 모든 곳에서 참은 아닐지라도 지구에서는 다리가 무너지지 않게 해 주듯, 인문학적 유산들이 보편적 진리가 아닐지라도 내 삶이라는 특수한 환경 안에서 작동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도구입니다. 어떤 철학 이론이 논리적으로 완벽함을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학계에서 외면받는 이론이라고, 그 이론을 꼭 폐기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삶의 권태를 막는 강력한 에너지 모터로, 불교의 무아론과 정신의학의 신경안정제는 자아 과부하를 방지하는 냉각 시스템으로 사용하는 식입니다. 행동심리학을 도구로 삼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습관을 만들어 삶을 지탱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엄밀한 정합성에 매몰되기보다, 이 생각이 나의 내일을 오늘보다 조금 더 낫게 작동시키는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가져와 조립할 수 있는 겁니다.

무기 창고에 갇힌 너드

하지만 간과하면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무엇이든 가져올 순 있으나, 무엇을 가져오든 잘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필요한 것을 약탈해 오기 위해 뛰어든 영토는 낯설기에,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공학자들은 주로 도구로 사용해 왔던 물리 법칙과 수식에는 정통하지만, 철학이나 심리학을 전문적으로 접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비정한 약탈자였으나, 인간 탐구의 세계에서는 겁먹은 초행자입니다. 우리는 수학과 과학이 제공하는 수많은 복잡하고 난해한 무기들에 집중하느라, 무기 창고에 갇혀 인간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잘 알지 못하는 괴짜, 너드가 되어버린 겁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공학의 힘은 단순히 날카로운 도구를 많이 소유하는 데에 그치진 않습니다. 우리는 제한된 도구 몇 가지 만으로도 극적인 효율을 낼 줄 압니다. 반도체 칩을 분해해 보면 나오는 부품이라곤 작디작은 트랜지스터와 캐패시터, 금속 전선이 고작입니다. 하지만 반도체 공학자들은 이 단순한 트랜지스터를 수백억 개 조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몇십 년 전 인류로썬 상상해 볼 엄두도 낼 수 없는 놀라운 기능들을 구현해 냅니다. 즉, 작은 개별 소자만으로는 넘을 수 없던 한계를 거대한 규모의 힘으로 뛰어넘어버리는 공학의 또 다른 능력, 바로 설계의 영역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두렵고 낯선 세상의 문제를 풀기 위해 방생된 공학자는, 일단 자신이 그나마 쓸 수 있는 소소한 무기를 몇 개 준비해 볼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설계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하찮아보였던 그 무기들을 활용해 삶이라는 압도적인 문제를 해체하고 풀어내보겠습니다. 이 연재의 제목인 인생철학 설계방법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설명, 이제 단 한 챕터 남았습니다. 종교와 철학, 정신의학과 심리학. 그리고 공학. 이제 마지막으로 설계자가 등장할 때가 왔습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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