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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선 Nov 19. 2021

[전시 관람 후기] 노동자로서 나를 정체화하기

<경이로운 전환>, 부산현대미술관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부터 나는 돈에 대해 특히 조급해하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어릴 때부터 가난에 대해 지겹도록 들어온 탓이고 또 하나는 내가 돈 관리를 잘 못 할 사주or관상이라는 소리를 꽤 많이 들어온 탓이다. 그래서 나는 돈 관리만큼은 제대로 해보리라 다짐을 하고 대입을 마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구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4대 보험을 지불하고, 근로장려금을 받는 등 나름 노동자로서 나를 정체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2년간 학생 겸 노동자로서 살아온 지금 나는 여전히 조급하다. 나의 노동력이 화폐 가치로 전환된다는 자본주의의 순리가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있다.


 전시 서문에서 노동 소득과 불로소득에 대해 이야기한다. 불로소득은 낱말 그대로를 풀어쓰면 일을 하지 않고 얻는 소득이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의 노동력, 타인의 노동소득을 그 원천으로 삼는다. 나의 노동력이 돌고 돌아 누군가의 불로소득이 된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며 동시에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나의 노동력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자본이 돌고 돌아 누군가의 소득이 되는 동안 나의 노동은 옅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시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권은비 작가의 <노동의 지형학-12개의 장면들>이다. 아크릴 판을 매달아 둔 조형 작품을 보며 오디오를 듣게 되어있다. 아크릴 판과 오디오를 대조하며 어느 아크릴 판이 어느 오디오와 연결되어있는 작품인지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아크릴판의 모양은 꽤 추상적이어서 사실 어떤 오디오에 대입해도 나름 다 말이 될 듯싶었다. (물론 어느 아크릴 판은 나타내는 내용이 분명한 것도 있었다.) 이 작품은 노동자의 "있음" 즉 존재에 주목한다. 내가 앞서 나의 노동이 옅어진다고 느낀다 말했기에 이 작품이 특히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장면 5, 날짜와 날짜 사이의 빈칸은 일정기간 동안 신고된 산업재해 사망사고의 종류를 읊어준다. 감정 없이 끼임, 깔림, 넘어짐 등의 단순한 단어를 나열하는 음성은 담담하기에 더 무섭다.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그만큼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저 평범하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으로만 치부되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내가 항상 긴장하며 바라보고 있는 주제다. 아버지가 언제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고이기 때문이다. 또 요즘 들어 산업재해로 사망한 내 또래의 청년들의 죽음을 기사로 보게 될 때면 나는 큰 무력감과 죄책감을 함께 느낀다. 나는 산업재해 사망사고와는 거리가 있는 일을 하는 노동자지만 항상 이 주제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함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할까?


 장면 10, 투명한 구름의 층위

 태초에 대지가 있었다. 대지는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자본을 낳고 자본은 소유를 낳았다. 소유는 힘을 낳고 힘은 식민지를 낳고 식민지는 자본주의를 낳았다. 자본주의는 산업을 낳고 산업은 생산을, 생산은 공장을, 공장은 노동자를, 노동자는 상품들을 낳았다. 상품들은 이윤을, 이윤은 기술을, 기술은 잉여인력을 잉여인력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 노동자는 착취를 낳았다. 착취는 잉여 가치를, 잉여가치는 불평등을, 불평등은 차별을, 차별은 계급을, 계급은 계층을 낳았다. 계층은 두려움을, 두려움은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는 분열을, 분열은 충돌을, 충돌은 적을, 적은 투쟁을, 투쟁은 희생을, 희생은 죽음을 낳았다. 그리고 죽음은 무엇을 낳는가?


장면 10의 오디오 내용이다. 태초의 대지부터 시작하여 노동의 순환을 따라 죽음까지 가는 긴밀하고 끈질긴 단어의 고리들이 숨 막히게 인상 깊다. 저 길고 긴 단어의 연결들이 끊어지지 못한 채 저 고리들 안에서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가 고통받고, 누군가는 가난해지고, 운 좋은 누군가는 부자가 되는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다. 이것이 그저 세상의 순리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괴롭다. 나 역시 작게나마 저 고리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이기에 더 괴롭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저 단어의 연결들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끊어질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저 단어를 구성하는 나의 노동력은 너무나도 가벼운 가치라는 생각이 들어 암울해진다. 이때까지의 다양한 노동 관련 사건들이 그것을 대변해준다. 나의 노동력이 사라지더라도 저 단어들의 물레방아는 잘만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라진다. 단어들의 물레방아가 주는 견고함과 내가 제공하는 노동력이 갖는 힘의 차이가 너무 극명하여 나는 불안함을 느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자신을 정체화 한다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 순리의 견고함과 노동의 나약함 속에서 끝없는 무력감과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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