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파충류·관상어 박람회를 다녀오며
이번에 파충류&관상어 박람회를 다녀왔다. 전시회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설렘이나 영감이 아니라 피로감이었다.
나는 약 네 시간 반 정도 전시장을 걸어 다녔다.
그런데 막상 나왔을 때는, 내가 무엇을 봤고 무엇을 놓쳤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잉어'를 봤어", "부스 중에 '식물'이 있었어."라는 이야기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와 같은 사항들을 인식할 수가 없었다.
해당 박람회에서는 나눠주는 팜플렛이나 부스 지도 같은 게 없어서,
전체 구조를 파악하거나 지나온 경로를 기억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가 물었다. “회사 A 부스 있었지? 우리 그거 놓친 거 아냐?" 라고.
나는 그것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은 내 기억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보가 참가자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UX 관점에서 보면, 전시회는 조각조각 소비되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관람객이 부스에서 부스로 연속적으로 이동하도록 했지만,
머물거나 되새기거나 일관된 경험을 만드는 구조는 아니었던 것 같다.
휴식 공간도 제한적이었다.
거의 대부분 음식 부스 근처에 몰려 있었고,
심지어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어서 앉을 수조차 없었다.
부스와 부스 사이에 잠깐 앉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휴식 공간은 단순히 앉는 곳이 아니라, 방문객이 계속할지 멈출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피로가 쌓일수록 질문은 “더 볼 게 있을까?”에서 “이제 그만 가야 하나?”로 바뀔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추첨 존(raffle zone)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건 한국 전시에서는 드문 시도였는데(해외 박람회에서 벤치마킹 해서 가져 왔다는 것 같다), 무조건 추첨 발표 시간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박람회 참여자가 '직접 수령'과 '택배'를 선택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이건 추첨 발표 시간까지 여유를 낼 수 없는 이용자들까지도 고려한 방식이었다. 즉, 해당 추첨 존은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리적 배치가 약간 혼란을 만들었다.
전시된 아이템과 추첨 박스가 너무 가까워서 어떤 박스가 어떤 아이템과 연결된 건지 바로 알기 어려웠다.
그 작은 혼란이 이용자를 머뭇거리게 만들었고, 그 순간은 원래 좋았던 아이디어의 흐름을 잠시 끊었다.
부스 이름 표시 방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 이름이 눈높이 아래에 붙어 있거나, 부스 뒤에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통로에서 봤을 때 해당 부스가 어떤 부스인지 파악이 전혀 불가능했다. 보이는 물건들로 유추하거나 추측해야 했던 것이다. 즉, 참조 지점(reference point)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입구에서 가까운 가운데”라든가, “왼쪽 끝에서 두 번째 줄” 같은 식의 쉽게 설명 가능한 좌표같은 것 말이다. (X열 12번 같은 간단명료한 위치 정보 말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부스는 실제로 있었는데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전 주최 측이 올린 짧은 영상 덕분에, 내가 어떤 부스를 우선순위로 둘지 결정했고 일찍 도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박람회는 문이 열리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면, 그 방향성이나 흐름을 유지하거나 지원해주는 시스템이 없었다.
(심지어 나중에 알았지만, 사전에 안내되지 않은 이벤트가 있었고 시작이 늦어졌기에 오픈런을 뛴 사람들은 해당 혜택을 확인하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집으로 귀가해야만 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드는 느낌은, 그 해결책이 꼭 오프라인 환경 안에서만 존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이 브로셔를 간단한 QR 코드로 대체하면 사람들이 부스 위치나 정보를 디지털로 즉시 확인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전시가 끝난 순간에 경험도 같이 끊겨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전시 이후에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웹페이지나 앱 같은 시간 제한형 온라인 공간이 있다면, 전시가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지 않을테니, 관람객의 완성감(completion)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개인적으로 하나의 확장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백그라운드에서 조용히 전체 경험을 지원하는 AI 같은 존재다.
여기서 말하는 AI는 알림으로 사람을 압도하거나 과도하게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가이드 NPC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비서나 박물관의 큐레이터 같이 말이다)
예를 들면:
* 지금까지 어디를 다녔는지 기억하는 AI
* 방문자가 상호작용한 부스를 요약해주는 AI
* 다음에 볼 만한 곳을 부드럽게 알려주는 AI
* 모든 브로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핵심 설명만 간단히 전달해주는 AI
결국 이 박람회에서 부족했던 건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 그 콘텐츠를 관람객이 이어서 간직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콘텐츠를 어떻게 계속 끌고 갈 수 있도록 돕느냐,
다음 박람회에도 참여할 마음을 어떻게 만들도록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모든 박람회와 전시가 이렇게 아쉬움만 남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더 많은 관찰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기획이라는 건, 자그마한 의문 하나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