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 부모님의 사랑
서울 생활 이후, 욕심내는 세 가지 음식이 있다.
첫 번째는 고구마 피자, 두 번째는 두부, 세 번째는 닭볶음탕
세 가지에 한해서는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피자가 맛있다는 단순한 이끌림이었다. 곁눈질로 피자가 만들어지는 걸 보며, 종류별 맛과 원가를 파악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고구마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브랜드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그때 당시 일했던 매장의 고구마 무스가 가격 대비 꽤 괜찮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손에 고구마 피자를 들고 가곤 했다. 집까지 거리는 20분 남짓이었다. 그 짧은 거리마저도 행여나 고구마 무스가 쏠릴까 봐 걸음을 조심히 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채, 입 안에 진득하게 맴돌 달콤함을 상상했다. 강추위를 뚫고 종종 걸어 들어왔다. 마침내 피자 한 입 베어 물면 그리 행복할 수 없다. 기분이 달다. 그런데 마음에는 이상하게 가시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특히, 달콤한 고구마 무스와 대비되어 짭짤했다.
아빠는 콩을 좋아하신다. 흰쌀밥에 검은콩만 있어도 밥을 두 그릇씩 드신다. 엄마의 요리 부담을 덜기 위한 남편의 배려였던지 혹은 원래부터 콩에 흥미가 있는 사람인지 궁금했으나 결론을 내렸다. 그는 태생적으로 콩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근거를 제시하자면 아빠는 두부도 잘 드시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콩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라왔다. 시장에 가면 파는 콩국물이 우리 집 냉장고에는 심심찮게 보였다. 톡 쏘는 콜라보다 고소한 콩국물의 목 넘김이 더 시원하다. 식습관은 환경의 일부라 유전일 수밖에 없다. 별안간 어린 시절의 나도 두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찌개, 부침, 조림, 튀김 모두 가능한 팔색조 두부가 매력 있다. 소주와 삼겹살의 조화를 몰랐단 스물 이전에는 두부가 요리계의 승자였다. 지금도 두부가 근소하게 더 끌릴 때가 있다. 가령, 끼니가 귀찮은 날에는 풀무원 두부 한 끼로 해결한다. 보들보들한 두부라 숟가락이 푹 파인다. 그럴 때, 예기치 않게 뻑뻑한 무언가가 있다.
닭볶음탕은 시뻘건 양념에 감자를 넣어야 제 맛이다. 매콤해 보인다면 해결 방법이 있다. 고구마 세 점을 추가하면 입 안의 조화가 적절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감초 같은 맛이 확 당긴다. 고등학생 당시, 야간 자율학습은 필수였다. 매일 같이 학교에서의 16시간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난 주말이 그럴 때였다. 스트레스를 게워 내고 싶었다. 하지만 수험생의 법칙인 불닭볶음면을 먹기에는 속이 편치 않은 면이 있었다. 가짜 닭은 입이 아프게 매웠다. 그래도 내게는 진짜 닭이 있었다. 엄마는 닭볶음탕에 소질이 있으시다. 닭이 고와질 때쯤, 대파를 어슷 썰어 큰 은색 냄비에 쏟아붓는다. 보글보글 또다시 칼칼한 향이 끓어오른다. 나는 식탁 앞에 놓인 닭볶음탕 국물을 한 숟갈 크게 뜬다. 매콤하다. 질세라 옆에 있는 고구마도 집어 든다.
나는 요리사가 아니라 양식과 한식의 조합을 헤아릴 수 없다. 공통점 하나 없는 고구마 피자, 두부, 닭볶음탕에 끌린다는 사실이 모순적이기만 하다. 결국 조화를 이뤄내는 건 먹어도 질리지 않는 부모님의 사랑인가 보다. 고구마 피자는 달콤한 듯 짭짤하고, 두부는 보들보들하여도 뻑뻑할 때가 있다. 어느새, 시뻘건 닭볶음탕 보다 맵다는 편의점 라면 하나에 익숙해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