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이 다시 쓴 꽃말
김소월의 〈진달래꽃〉
소월이 다시 쓴 꽃말
진달래는 산자락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꽃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그 꽃을 ‘참꽃’이라 부르며 따먹었고, 꽃잎을 짓이기며 놀았다. 진달래로 화전을 부쳐 먹던 기억도 생생하다. 쌀가루 반죽 위에 한 장씩 얹어 지져내던 화전, 입안에서 달짝지근하고 싱그러운 봄의 맛이 퍼지곤 했다. 내게 진달래는 맛과 냄새와 색깔과 촉감으로 몸에 새겨진 꽃이었다.
흔히 진달래의 꽃말을 ‘사랑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꽃말은 꽃이 오래 품어온 고유한 뜻이 아니라 서양의 꽃말 문화가 들어온 뒤 도감이나 사전에서 붙여진 의미에 가깝다. 진달래는 본래 우리의 산과 들에서 조용히 피고 지는 꽃이었고, 특별한 상징적 의미보다는 봄을 여는 가장 먼저 핀 꽃, 입안에 달큰한 맛을 남기던 참꽃으로 기억되는 꽃이었다.
오히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진달래의 의미는 김소월을 지나며 달라졌다. 〈진달래꽃〉 이후 진달래는 더 이상 ‘사랑의 기쁨’이라는 밝은 얼굴이 아니라, 보내지 못하는 마음을 눌러 담은 꽃, 말없이 이별을 덮는 꽃, 울지 못한 채 절정에 선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김소월은 이 순하고 여리고 소박한 꽃에 전혀 다른 의미를 새겨넣었다. 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인해 나의 진달래꽃은 사라지고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되었다. 봄을 여는 희망의 꽃에서, 죽어도 보내고 싶지 않은 이를 끝내 보내며 깔아놓는 이별의 꽃으로 변한 것이다.
첫 구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에서 만나는 ‘역겨워’라는 단어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역겹다’는 말은 몸서리칠 만큼 혐오스럽다는 뜻이다. 연인 사이에서 상대가 역겨울 정도라면 그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며, 관계가 붕괴되었다는 선언과도 같다. 상대에게 역겨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죽음과 다름없는 감정의 파국이 아닌가.
그러나 소월의 시에서 이 말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화자가 꾸며낸 가정처럼 보인다. 임이 자신을 역겨워할 리 없다는 은밀한 자기확신이 그 아래에 깔려 있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이지만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으니 미리 견뎌보려는 마음, 붙잡을 수 없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며 다가올 충격을 완화하려는 마음—그런 심리가 이 가정의 형태로 드러난다. 화자는 극단의 상상을 스스로에게 들이대며, 이별의 고통이 닿기 전 방어막을 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시의 ‘역겨워’는 가혹한 혐오의 언어라기보다, 이별을 어떻게든 견뎌내려는 자기 위안에 가깝다. 이 시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보내지 못하는 마음’이다. 죽어도 이별하고 싶지 않지만, 이별을 피할 수 없는 마음.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다고 놓아버릴 수도 없는 마음. 그 양가의 틈에서 흔들리며 소월은 한국적 한의 정서를 집약해 낸다. 사랑의 마음으로 붙잡고 싶어 하면서도, 이별의 마음으로 놓아주려는 그 복잡한 심정이 〈진달래꽃〉에는 겹겹이 포개져 있다.
〈진달래꽃〉의 정점은 마지막 행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에서 찾아온다. 이 문장은 화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감정의 마지막 지점에 놓여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다. 울지 않겠다는 말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감정의 최고치다. 눈물을 흘리면 이별이 완성될 것 같아 끝내 울지 못하는 마음. 울지 않음으로써 감정을 붙들고 있는 마음. 폭발적인 오열이 아니라 마지막 힘으로 자신을 붙드는 절정의 목소리다.
예전의 나는 이 말을 정반대로 읽었다. 임이 떠나면 펑펑 울어버리겠다는 과장으로 들렸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르게 들린다. 울어버리면 스스로 무너질 것 같아, 정말로 이별이 찾아올 것 같아, 눈물을 삼키며 버티는 침묵. 이 한 줄은 오히려 침묵 속에서 참다 참다 터져 나오는 울음에 가깝다.
소월의 진달래가 마음속에 들어온 이후, 나의 유년의 진달래는 설 자리를 잃었다. 소월의 진달래는 어린 날의 참꽃 이미지를 밀어내고 다른 얼굴로 피어났다. 이제 진달래는 더 이상 봄의 감각을 깨우는 꽃도, 손끝에 분홍빛을 남기던 꽃도 아니다. 그 꽃은 누군가를 보내며 차마 울지 못해 입술을 깨물던 마음, 끝내 붙잡지 못하는 사랑의 마음을 품은 채 피어나는 꽃이다.
그래서 산자락에 무심히 피어 있는 진달래를 볼 때마다, 나는 어릴 적의 참꽃보다 소월의 진달래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문장 속에서 진달래는 피어나고, 그럴 때마다 소월의 마음이 한 줄기 바람처럼 스쳐와 내 마음 깊은 곳의 오래된 슬픔을 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