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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75

이름이 없어도 서로를 알아보는 존재

by 인상파

루리의 『긴긴밤』


이름이 없어도 서로를 알아보는 존재


『긴긴밤』이라는 동화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동물의 여정을 다루는 우정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생의 깊은 층위—상실, 정체성, 관계, 그리고 기적—이 담겨 있다. 내가 특히 마음을 두고 본 것은 펭귄이 말하는 ‘기적’이라는 말이었다. 노든과 펭귄이 끝없는 초원을 지나 호수에 도착했을 때, 두 동물은 자신들이 서로에게 남은 유일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세상에서 별볼일 없는 존재 둘이 서로가 서로의 생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펭귄에게는 기적 그 자체였다.


이 기적의 순간을 들여다보면, 정체성이란 것이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규정할 때 그 사람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가 어떤 이들과 어울렸는지, 어떤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는지, 무엇을 주고받으며 살아왔는지를 함께 본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정체성은 결국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보여주라,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인다는 말처럼, 한 존재의 윤곽은 그가 맺어온 관계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선명해진다.


펭귄이 이름이 없다고 말하며 불안을 느낀 것은 단순한 결핍 때문이 아니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나를 규정해 줄 언어가 없다는 의미였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소속의 부재에서 오는 존재론적 불안이었다. 그때 노든이 건넨 말은 짧았지만 깊었다.


“나는 너를 냄새로도, 발자국으로도 알아봐.”


이 말은 이름의 중요성을 가볍게 넘기는 표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름이 기능을 잃은 세계에서 정체성을 지탱해 주는 더 근원적인 방식—관계, 기억, 서로를 알아보는 감각—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름이 사라져도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체성은 누군가가 나를 잃지 않고 기억해 주는 그 관계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펭귄은 노든이 초원에서 보내준 무언의 지지를 등에 업고 푸른 바다를 향해 절벽을 오르고, 미끄러지고, 다시 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에 도달한 그 순간, 노든이 들려준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져 깊이 이해된다. 자신을 키워 준 치쿠의 사랑, 마지막 코뿔소로 살아가야 했던 노든의 운명,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의 무게가 서서히 가슴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제야 펭귄은 알게 된다. 이름이 없어도 언젠가 노든을 다시 만나면 코와 부리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정체성은 이름보다 더 깊은 곳에서 생겨나고, 서로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고 있는 동화를 보면서 나라는 존재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내 힘으로만 구축한 단단한 자아가 아니라, 내 곁을 스쳐 간 관계들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물이 나라는 것을. 어떤 인연의 이별과 어떤 인연의 지속이 내 안에서 응결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어왔다. 노든이 펭귄에게 그랬듯, 우리 역시 타인의 시선과 지지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그 확인 위에서 비로소 자기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 후반에 이른 지금, 나도 누군가의 노든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이름 없는 불안 속에서 흔들릴 때,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도록 “나는 너를 알아본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누군가의 생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까지 조용히 곁을 지켜주거나, 그가 더 멀리 가야 할 때는 다정하게 등을 떠밀어 줄 수 있는 어른. 그런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긴긴밤을 버틸 수 있다는 걸 동화는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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