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망각 배터리" 분석
작가 미카와 에코에 의해 만들어진 만화 "망각 배터리"는 중학교(시니어)시절 천재 배터리로 불렸던 투수 키요미네 하루카와 포수 카나메 케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야구 만화입니다. 여기서 배터리란 군사용어에서 유래된 야구용어로, 투수와 포수를 엮어부르는 말입니다.
키요미네는 초구로 141km/h 이상을 가볍게 던질 수 있는 본격파 우완투수입니다. 구속으로만 보았을 때도 지금 당장 프로로 뛰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죠. 180이 넘는 키와 체격과 스펙을 따져도 말이 필요없는 수준인 그는 타자로서도 잘치는 강타자인 완벽초인입니다.
그런 키요미네를 보조하는 포수 카나메 역시 시니어 시절부터 지장(智將)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중학생 답지 않은 뛰어난 리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중학교 체급을 한참 넘어서고도 남은 상황, 이 두 사람의 배터리는 중학 시절부터 온갖 유망주들을 차례차례 깨부수며 야구소년들에게 악몽 그 자체로 남고 말았습니다...만!
허나 이렇게 승승장구 할 것 같던 천재 배터리에게 하나의 큰 변곡점이 생기게 되니, 바로 포수인 카나메가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카나메는 야구는 물론 같이 배터리를 짜오기 이전에도 소꿉친구였던 키요미네마저 새까맣게 잊어버린채 바보가 되고 마는데요.
설상가상으로 바보 카나메는 야구를 굉장히 불쾌하게 여기며 야구부가 없는 도립 학교, "코테사시 고교"로 전학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공은 카나메 밖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키요미네는 그의 말에 명문 고교들을 전부 차버리고 덜컥 코테사시 고교의 진학을 결정하죠.
그런데 왠걸, 코테사시에 진학을 결정한 것은 카나메와 키요미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배터리와 승부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팀이 졌다는 죄책감에 빠져 야구를 관둔 토도 아오이, 똑같이 그들에게 지면서 모종의 이유로 야구를 관둬버린 치하야 슌페이, 그리고 배터리를 만나면서 자신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야구는 아니라고 생각해 포기한 야마다 타로.
이 세 사람도 야구를 포기하기 위해, "망각"하기 위해 코테사시에 오고야 만 것입니다.
그렇게 괴물 배터리와 그들에게 실패를 맛본 세 사람은 다시 코테사시 고교에서 모이게 됩니다. 이 다섯 명은 다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실패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카나메는 왜 기억을 잃게 된 것일까요?
-이 아래부터는 정발본 12권까지의 스포일러가 함류되어있습니다-
망각 배터리는 야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카나메가 야구를 다시 경험해가며 야구에 대한 즐거움을 찾아간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 라이벌이었던 자들이 이번에는 동료가 되어 자신들의 꿈을 부순 자들의 등을 지켜주며 다같이 고시엔에 도전한다는, 클리셰적인 일본 야구 청춘 로망 요소가 가득 담겨있는 만화기도 합니다.
바보가 된 카나메의 온갖 바보짓들과 야구밖에 모르는 키요미네의 광기어린 짓, 그리고 그런 배터리를 향해 츳코미(딴지)를 거는 나머지 세 사람의 가벼운 개그 청춘물이 기본 베이스지만, 야구를 할때 만큼은 그리고 그들이 망각하고 싶었던 과거사가 벌어지는 파트에서는 상당히 딥하고 어두운 스토리가 등장합니다.
과거 배터리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실수가 패착으로 이어졌던 토도의 경우, 그날의 실수가 그대로 입스가 되어 영영 1루로 송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입스를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고치지 못하게 되자 패싸움을 이어나가며 방황하다 결국 야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으며 도립 코테사시에 입학했던 것이었죠.
치하야는 167cm정도밖에 되지 않는, 운동선수기준 작은 체구가 콤플렉스인 캐릭터입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야구를 공부하면서 "야구는 피지컬이 아닌 기술과 이론"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허나 배터리를 마주하면서 피지컬(키요미네)이 기술과 이론(카나메)을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고 온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죠.
하지만 절망을 했던 것은 이 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깨부셨던 배터리의 포수인 카나메 역시 키요미네의 재능을 따라가기 위해 지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리드를 갈고닦으며 발버둥쳤지만, 결과적으로 재능이라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카나메는 기억상실에 걸리게 된 후 야구의 즐거움을 깨달았지만, 결국 그 야구가 트리거가 되어 괴로운 과거들을 기억해내고 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기억을 잃어버리고 또 야구를 시작해버렸다는 사실에 질 나쁜 루프물을 겪는 것 같다며 크게 괴로워합니다.
이처럼 망각 배터리에서의 "망각"이란 과거를 잊으려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진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카나메 뿐만 아니라 과거(야구)를 잊기 위해 코테사시 고교에 진학한 나머지 세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죠.
과거를 잊고 뒤로하려는 자들이 결국 다시 과거와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보니 작중 유달리 비슷한 연출을, 비슷한 상황에 계속 반복해 사용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유의깊게 보아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시로 토도는 입스에 걸릴때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고 독백을 하는데, 테이토쿠 전에서 입스를 극복할때도 거의 비슷한 연출이 사용됩니다. 상황이나 대사 역시 비슷하죠.
아예 작중에서 어떤 캐릭터가 어느 고교 전에서 어떤 식으로 활약했는지 전체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러한 점이 훨씬 더 명확해집니다. 그래서 작품을 읽다보면 계속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카나메의 말대로 루프물 같죠?
대신 그의 말처럼 질나쁜 루프물이 아닌, 조금씩 달라지는, 성장하는 루프물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요.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미래는 과거를 거름삼아 조금씩 성장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망각 배터리는 과거의 시나리오와 연출, 캐릭터의 행적이 현재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의 실패가 현재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설령 과거를 잊는다고 하더라도 과거는 계속해서 등장인물들의 뒤를 뒷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하네요.
이렇게 과거를 "망각"한 인물들은 많은데,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배터리"의 두 사람입니다. 기억을 잃은 포수 카나메와 모든걸 기억하고 있음에도 카나메가 괴로워하던 것에 거의 알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던 투수 키요미네죠.
특히 작중의 메인 주인공인 카나메의 경우가 좀 눈에 띄는 편입니다. 처음부터 기억상실에 걸려 온갖 바보짓을 하는 것도 그렇고, 12권 부터는 사실상 본래의 바보 인격과 지장시절의 인격이 따로 나눠져 이중인격 상태가 된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하겠지만, 제가 주목한 부분은 이 캐릭터가 자신을 챙기는 듯한 느낌이 거의 없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에서 나왔습니다.
키요미네의 재능에 따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던 과거의 카나메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만약 단 하나만 잊을 수 있다면 야구를 잊고싶다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리고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닌 키요미네의 바터로 명문고에 합격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되자, 정신적으로 크게 몰리며 순간적으로 키요미네 하루카를 잊고싶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모든 걸 기억해낸 현재의 카나메는 키요미네의 바터밖에 되지 못한 자신에게 절망했지만,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어서서 극복해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이 왜 기억을 잃었을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나는 정말 키요미네 하루카를 잊고싶었을까?"라는 생각을 문뜩 하게되죠.
그리고 여기서 작중에서 손꼽히는 명대사가 등장합니다.
(오른쪽부터 읽어주세요)
추악한 자신을 잊고 다시 한번 키요미네 하루카와 배터리를 짜고 싶다
카나메의 대답은 언뜻 보면 굉장히 감동적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무언가 이상합니다. 카나메가 키요미네를 잊고싶다고 생각을 한 게 과연 정말 추악하기만 한 것일까요?카나메에게 있어서 과거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기억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사실 카나메가 정말로 해야했던 것은 키요미네를 잊고 싶다고 몰려있던 과거의 자기자신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약한 부분마저 인정하고 사랑했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 의문은 12권 이후로 더 깊어지게 됩니다. 12권 이후 아예 카나메는 바보인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지장이라 불렸던 시절의)을 분리해버리게 되는데요.
지장쪽 인격은 현재의 카나메(주인격)에게 자신은 그저 키요미네 하루카라는 재능을 미래로 전하기 위해 야구를 기계적으로 했을 뿐이며, 자신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주인격이 성장하면 자신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나메는 그런 지장이 야구를 즐겁다고 여기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작중에서는 초보인 카나메의 성장을 위해 적절한 멘토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키요미네의 과거사를 풀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과거의 카나메와 단판을 지어야 했기에 지장 인격의 등장이 이를 위한 것이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는데요.
허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예 과거시절의 카나메를 직접 독자들 눈 앞에 들이밀어 카나메의 문제점을 직시 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네요.
"야구를 즐겁게 생각한다" 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야구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장 시절의 카나메는 키요미네 하루카의 미래를 위해서 야구를 해왔을 뿐, 본인을 위해서 야구를 하지 않았죠.
그렇기에 야구가 괴로웠고, 야구를 잊고싶었고, 야구가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뒷전으로 한 채 키요미네의 미래를 위해 모든것을 바쳤죠. 그래서 청춘과 오락을 전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키요미네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더더욱 혐오했구요.
이 작품에서 지장이 바보 카나메의 말대로 야구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키요미네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 야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실 카나메 케이가 정말로 잊어버렸던 건 야구도, 키요미네 하루카도, 자기 자신도 아닌, 결점이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아니었을까요?
마침 애니메이션 1기 OP인 라일락이 (mrs.green apple 작곡) 후반부 가사가 이와 유사하다는 것이 꽤 재밌는 부분인데요.
라일락의 가사에는 비가 온 뒤에 새싹이 자라나듯 과거는 의미 없지 않으며, 불안하고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내용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대놓고 맨 마지막에는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문장이 직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즉, 이 작품의 주제는 돌고돌아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 조차 망각해버릴 정도로 과거를 거부했던 주인공이 과거를 마주하며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습니다.
설령 아무리 망각한다 하더라도, 토도와 치하야가 그랬듯이 배터리도 잊어버렸던 과거를 마주하게 되겠죠. 정말 "망각 배터리"라는 제목과 딱 떨어지는 주제라고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두 카나메 모두 진심으로 야구를 즐겁다고 여길 수 있는 날이 올지, 자기 자신의 결점마저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배터리가 과거를 마주할 수 있을지 여러분들도 주목해서 작품을 시청해주신다먄 더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망각배터리는 현재 14권까지 E북으로 정발되었으며(단행본은 15권까지 나왔고 올해 2월에 16권이 예정되어있습니다), 일본에서는 20권까지 나왔습니다.
일본어가 되시는 분들은 소년점프+를 통해 무료로 즐겨보실 수 있으니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1기를 티빙이나 웨이브같은 OTT로 5권 중반부 분량까지 감상하실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체인소맨, 주술회전 등의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마파(MAPPA)가 만들어서 액션 퀄리티가 굉장히 뛰어난 것이 장점이에요.
개그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지만 뛰어난 야구 작화와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적절하게 연출하며, 무엇보다 일관적인 주제와 임팩트 있는 경기장면이 인상깊은 작품이니 관심이 가신다면 한번쯤 찾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