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이다. 고향 친구가 보내온 눈 내린영동지방의 영적 모산(母山),두타산(頭陀山) 사진을 보면서 옛적, 누님과 함께 두타산 정상에 올랐던 추억이 떠올랐다.
2003년 11월, 히말라야안나푸르나의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 한 적이 있지만 정작 고향에 있는 두타산 정상에 가본 적은 없었다.
쉰움산에서 바라본 두타산
2004년 4월 어느 날, 동해시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두타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삼척시 미로면 천은사에서 두타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를 택했는데천은사는 고려시대, 문인 이승휴가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으로 잘 알려진 절이다.
천은사 입구에서 시내버스를 하차해 조금 걸으니해탈교가 나타났고 이 다리를 건너가자 두타산 자락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천은사가 눈에 보였다. 새소리 들려오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새봄이 왔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천은사는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인도에서 온 3명의 승려, 두타삼선이 흰 연꽃을 가져와 758년 (신라 경덕왕 17), 창건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절이다. 천은사의 창건 당시 이름은 백련대(白蓮臺)다. 이후 829년(흥덕왕 4)에 극락보전이 건립되면서 사찰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1899년(고종 광무 3)에는 이 절에 조포소를 설치하여 이성계 5대조 이양무장군묘인 준경묘를 나라에서 조성할 때 제사에 사용할 두부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가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고 천은사(天恩寺)로개명한 것이다.
준경묘
이승휴(1244~1300년)는 고종 11년에 태어나 충렬왕 때까지 개성, 강화, 삼척을 전전하며 항몽 전쟁기를 살았다. 자는 휴휴(休休)고 호는 동안거사다. 그는 감찰대부라는 높은 자리까지 올랐고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국정을 문란케 하는 친원세력의 횡포와 충렬왕의 실정을 비판했다. 하지만 자신의 충정이 반영되기는커녕 왕의 미움만 사게 되자 미련 없이 어머니가 계시는 삼척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容安堂)을 지은 뒤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은둔생활을 하던 그가 침묵을 깨고 '제왕운기'라는 민족의 대서사시를 쓰게 된 까닭은 원의 지배와 간섭에 쓰러져 가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단군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우리 겨레가 중국 못지않은 오랜 역사와 훌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코자 하였으며 선정을 편 왕과 악정을 편 왕을 비교해 통치자로 하여금 선정을 펴도록 유도했다.
이승휴가 은둔생활을 마치고 제왕운기를 지으며 걱정하던 고려왕조는 끝내 그가 눈을 감고, 채 백 년을 버티지 못했다. 즉, 이승휴가 은거하던 천은사 부근, 활기리에서 살았던 목조 이안사의 4대손 태조 이성계에 의해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현재 이성계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부친 준경묘와 모친 영경묘가 미로면 활기리에 왕릉 수준으로 잘 보호되고 있다.
천은사
천은사 경내, 극락보전과 약사전 등을 둘러본 후, 오르막길을 약 1시간 반을 걸어 쉰움산 정상에 도착했다. 산에는 봄을 알리는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고 나뭇가지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쉰움산 정상에는 돌 웅덩이 수십 개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신비롭고 특이했다. 쉰움산이란 둥근 꼴의 크고 작은 우물이 쉰여 개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쉰움정이라고도 한다. 정상 부근을 자세히 살펴보니 제사를 올린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타다 남은 양초와 제사 음식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두타산 산허리에 오십여 개의 돌구멍을 오십정이라 불렀다. 가물 때는 모두가 마르지만 오직 한 곳은 푸른 이끼가 끼고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고여 있어 신정(神井)이라고 했다. 가뭄이 오면 기우제를 이곳에서 지냈다. 그 부근에는 제단이 있고, 읍인(邑人)들이 봄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 곳으로 기록되었다.
쉰움정
쉰움산은 무속의 성지로도 알려졌다. 산 곳곳에 자리 잡은 돌탑과 재단만으로도 이 산이 유명한 기도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산멕이를 한 처소로 사용되었다. 산멕이는 산을 먹인다는 말로 대접한다는 뜻이다. 태백산맥 산간 지방에서 행하는 산신 신앙을 지칭하는 말인데, 특히 삼척ㆍ동해지방의 특별한 민간신앙이다. 산멕이는 산멕이기, 산치성, 조상보기 등으로도 불리며 산신에게 가내 평안과 재앙을 막고 복을 부르는 의식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행한다.
쉰움산을 돌아보고 가파른 길을 2시간 정도 걸어서 두타산 정상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는 '두타산'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있고 바로 옆에는 산소도 있었다. 아마도 두타산 정상을 명당이라 여긴 어느 이웃이 후손이 번성하라고 묫자리를 썼다고 생각한다.
산 아래 펼쳐진 풍광을 보면서 누님이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등산 덕분인지 밥맛이 더욱 좋았다. 동쪽을 바라보니 동해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였는데, 내가 있는 곳은 신선이 사는 곳이요,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아파트는 중생들이 세파에 시달리는 속세라고 생각했다.
두타산의높이는 1,353m이다.산 이름 두타는 불교 용어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 이 산은 삼척ㆍ동해지방의 영적 모산으로 태백산맥의 주봉이다. 이 지방 주민들은 예로부터 두타산의 정기를 받고 생활한다는 민간신앙이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다.
어린 시절, 두타산 정상에 흰 눈이 내리면 겨울이 가까이 왔다고 믿었다. 흰 눈 내린 두타산을 신비롭게 바라보던 어린 시절이 아련하다. 날렵한 두타산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람하고 묵직한 청옥산이 보였다. 청옥산은 두타산에서 3km에 달하는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능선이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주능선이다. 해발이 두타산보다 51m 높은 산으로 1,404m이며 부근에 청옥이란 약초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청옥산은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에 걸쳐있는 높은 산으로 삼척지방의 역사기록지, 삼척군지(誌)에 따르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이곳의 소나무를 목재로 사용했으며 하장천에서 뗏목으로 한양까지 운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내가 쓰는 블로그 별명 '청옥'은 이 청옥산에서 인용하였다.
청옥산은 멀리서 눈으로만 확인하고 두타산성 쪽으로 하산했다. 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것보다 수월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은근히 힘들었다. 아늑하고 햇볕이 비추는 장소에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하늘을 바라보고 누님과 대화를 나누며 옛 추억을 회상해 보았다. 오늘 두타산 정상을 밟았다는 벅찬 감정도 서로 느끼는 듯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한참을 걸어서 두타산성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니 기암괴석과 병풍같이 둘러싼 화강암 절벽이 장관이었다. 두타산성에서 1km 떨어진 두타산 삼화사 관음암이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 두타산성은 조선시대 1414년(태종 14)에 축성된 산성으로 천연적인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성 쌓기를 한 곳으로 현재 두타산의 중턱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이 지방의 젊은 의병들이 왜군과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고 애통하게 3일 만에 함락되었다.
동해시에는 전천강이 시내를 관통하여 동해 바다로 흐른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왜군과 싸우면서 화살대가 강물 위에 흘렀다 하여 전천강(箭川江)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두타산성에서 무릉계곡 산책로까지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급했다. 산책로에 내려와 삼화사 방향으로 평지를 조금 걸으니 학(鶴)이 둥지를 틀고 생활한다는 학소대가 보였다. 동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폭포를 이루어 학소대 폭포라고도 한다. 그곳에서 산책로를 따라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약 15분을 걸어 삼화사 천왕문 앞에 다다랐다.
삼화사(三和寺)는 642년(선덕여왕 11) 신라 시대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라 했다. 864년 범일국사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이라 했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三和寺)라 개칭하였고 많은 부속암자를 지었다.
문화재는 신라 시대의 철불, 삼층석탑 및 대사들의 비와 부도가 있다. 삼화사 아래에는 무릉반석이 넓게 펼쳐져 있고 무릉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넓고 흰 너럭바위 위를 흐른다. 천여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큰 반석으로 예로부터 묵객들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무릉계곡 쌍폭
무릉계곡은 호암소에서 용추폭포에 이르는 4km의 계곡을 일컫는다.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며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에 따라 '무릉도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무릉반석에서 삼화사를 지나 학소대, 선녀탕, 쌍폭, 용추폭포의 아름다운 경치를 산책길을 걸으며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어느 여행 작가는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명소로 두타산 무릉계곡을 꼽았다.
무릉반석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시가 있고,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양사언의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 신선들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이라는 글도 음각되어 있다. 김홍도는 금란정 정자 옆에서 무릉반석의 경치를 그렸으며 금강사군첩에 ‘무릉계(武陵溪)’ 그림이 나와 있다.
금란정(金蘭亭) 부근 반석에는 강회계 창계회원들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 고장의 유학자, 홍정현(호 강암, 자 우팔)의 스승, 송병선(송시열의 9대손, 대사헌)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참을 수 없어 음독 분사하였고 이에 영동 지방 선비들이 통분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해 1906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정신으로 이 고장에서 학식과 덕망이 있는 유학자 홍락섭, 홍정현, 홍재환이 주도하여 강회계(講會契)를 조직했으며 창계동지 33인의 명단을 무릉반석에 새겨 놓았다.
홍정현(1875~1938년)은 나의 조부님이고 '강암유고'가 삼척시립박물관과 동해문화원에 보존되어 있다. 나는 무릉계곡을 올 때마다 무릉반석에 새겨진 할아버지 함자 '洪政鉉(홍정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평생 벼슬 없이 유학자로서 제자를 가르치고 문집을 쓰시며 올곧게 생활하신 할아버지가 존경스럽다. 나는 강회계 창계회원을 기리며 언젠가 '무릉계곡에서'라는 시를 지었다.
두타산 무릉계곡에서
미녀가 파도를 밟으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추암 해변
아침해는 솟아올라 두타산을 깨웁니다
해는 호암소(虎岩沼) 넘고
어느 시인의 시비(詩碑)를 지나
너럭바위 얼굴을 환하게 비춥니다
하늘문 꽃향기 계곡 따라 흐르고
삼화사 범종 소리 천지를 울릴 때
유불도(儒佛道) 신선들그 향기 흠향하고
너럭바위에 내려옵니다
무릉반석에 감도는 강회계(講會契) 정신,
두타산성 솔잎처럼 푸르고 푸르며
밤하늘 별빛같이 찬란합니다
호랑이가 소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호암소(虎岩沼)를 넘어 동해시 무릉계곡 매표소 입구로 나왔다. 해는 어느덧 두타산 능선으로 붉은 저녁노을을 토하며 기울기 시작했다. 오늘은 두타산에서 신선처럼 하루를 보냈다. 몸은 피곤했으나 고향의 영산, 두타산 정상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흐뭇하고 보람을 느꼈다.
눈 오는 날, 옛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마음속으로 두타산을 한번 더 걸어 보았다. 고향에 눈 내린 행복한 성탄절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