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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12. 2023

조선 왕조의 뿌리, 삼척 활기리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 도승이 지나가면서 사방을 둘러보고 하는 말이다. 이어서 "이곳이 제대로 발복(發福)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 마리를 잡아 사를 지내고, 시신을 금관에 안장하여 장사를 치러야 한다. 그러면 5대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이 나라를 바로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도주한 몇 년이 지난 1231년, 부친상을 당해 두타산 자락을 사방으로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마땅한 묫자리가 보이질 않았다. 마침내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 산마루에서 몹시 피곤해 잠이 들었는데, 이 꿈을 꾼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집으로 돌아온 이안사는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고, 금으로 된 관을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여러 가지 궁리한 끝에 소 백(百) 마리는 흰 소, 백우(白牛)로 대신하고, 금관은 황금색 귀리 짚으로 면 되겠다는 묘책이 떠올랐다. 다행히 처갓집에 흰 얼룩소가 있었다.

이안사는 다음날 그 를 빌려서 노동 산마루에 끌고 올라갔다. 그리고 백우를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의 시신을 넣을 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여 장사를 정성껏 치렀다.


명당자리에는 늘 설화가 있듯이 이양무 장군의 준경묘에도 백우금관(百牛金棺)의 건국신화가 전해온다. 설화 속에 꿈을 꾼 사람이 조선 왕국을 개국한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고 목조의 부친이 이양무 장군이다.


1230년 즈음 있었던 일이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살았던 지방 호족인데, 사랑하는 관기 때문에 산성별감과 다툼이 생겼다. 마침내 이안사는 지주사(知州事)와도 사이가 나빠져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안사는 문전옥답을 다 버리고 그를 추종하는 170여 가구의 식솔을 이끌고 전주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때 이안사의 나이가 27세로, 늙으신 부모님과 함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왔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이안사의 부친, 이양무 장군이 돌아가셨고, 집 근처 활기리 노동산(蘆洞山)에 묻혔다. 바로 이곳이 조선 왕조의 뿌리가 된 것이다.


나의 증조부모 산소가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에 있어 성묘 때에 준경묘를 몇 번 들러 적이 있다.

추석 무렵에는 성묘를 가기 위해 동해시 동해역에서 완행 기차를 타고 도경, 미로를 거쳐 상정역에서 내렸다. 급행도 서지 않는 조그만 산골 역으로 인적이 드물고, 겨울에는 눈이 키만큼 쏟아지는 첩첩산중 오지 마을이다.

상정역에서 기차를 내리면 오십천 시냇물을 건너야 한다. 어느 해는 홍수로 외나무다리가 떠내려가, 바지를 벗고 친척들과 손을 잡고 조심조심 시냇물을 건넜다.

당시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등에 짊어진 성묘 제물이 떨어지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시냇물을 건너고 큰 재를 넘어서 밤나무 숲을 지나면 마침내 증조부모 산소가 나타났다.


"왜 이런 첩첩산중 오지에  썼을까?"

하지만 성묘하러 온 사람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어른들께 여쭤보니 "이곳이 명당자리라 후손이 번성하라고 묫자리를 썼다."라대답하셨다. 성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다 지나가지만 성묘길에 밤을 줍고 감도 따면서 소풍 온 어린이처럼 마냥 기쁘고 즐거운 하루였다.


이안사가 전주에서 도주할 때 그의 부친 이양무 장군과 아무 연고도 없는 멀고도 먼 삼척으로 온 게 궁금했다. 아마도 이안사 외할아버지가 삼척 이 씨 시조인 이강제 상장군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이안사를 따르는 식솔의 생계까지 책임지려면 삼척 지방 토호세력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삼척 지방의 토호세력은 신라 경순왕의 손자 김위옹의 후손인 삼척 김 씨인데, 이안사와 그의 식솔을 얼마나 도왔는지 확인할 수 없다. 나는 고향에서 삼척 이 씨를 만나 본 적이 없고 세월이 흐르면서 무슨 일이 생겼다고 추측해 볼 뿐이다.

아무튼, 죽음을 무릅쓰고 전주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깊은 산골짜기로 올 수밖에 없는 이안사의 운명을 생각하면 그의 인생도 무거운 짐을 진 구름 같은 인생 나그네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안사와 전주에서 싸웠던 그 관리가 안렴사로 영전하여 강원도에 부임했다. 이안사는 화(禍)가 두려운 나머지, 부모님 산소는 삼척에 남겨둔 채, 20여 의 삼척 생활을 마감하고 함경도 의주(宜州)로 다시 도주했다. 때에도 전주 식솔과 삼척 사람을 포함하여 170여 가구가 이안사를 따라갔다고 한다. 지금 함경도에는 삼척 김 씨가 비교적 많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삼척 김 씨 고향 후배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아마 이안사를 따라간 삼척 김 씨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고향 친구가 어린 시절, 준경묘 근처에서 살았는데, 집에서 20여 리를 걸어서 미로국민(초등)학교를 다녔. 친구 어머니 친정은 이양무 장군의 부인 묘가 있는 미로면 하사전리(下士田里) 성은 전주 최 씨다.

친구는 두메산골인 미로면 하사전리에 여남은 채 되는 최 씨 마을과 전주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 본 결과, 아마 외갓집 조상이 이안사와 함께 전주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안사가 다시 함경도로 도주할 때, 준경묘와 경묘를 관리하기 위해 부득이 어느 사람이 하사전리에 남았는데 어머니는 그분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30여 년 전 추석날에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구는 제사 지방(紙榜)을 전주 최 씨라 쓰면서 어머니 조상의 행적도 제대로 모르는 불효가 죄스러워 눈물이 다고 . 사실 친구 어머니의 조상이 전주에서 이안사와 함께 걸어서 삼척으로 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렇게 상상수도 있겠다.

준경묘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삼척군이 목조 이안사의 외향(外鄕)이고, 선대 묘가 안치된 곳이라 하여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했다. 조선시대 태조를 비롯하여 태종, 세조 등 역대 왕들이 선조인 이양무 묘소를 찾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활기리에 있는 묘가 태조 이성계의 5대 조의 묘가 확실한지 많은 논란도 있었다. 결국, 1899년(고종 36년), 이양무 무덤을 준경묘라 부르게 되었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660여 년 만에 묘비가 세워진 것이다.

삼척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조상의 혼이 서린 고장으로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준경묘 가까운 곳에 웅장한 두타산과 신비한 환선굴이 있어 관광객이 일 년 내내 북적거린다. 그들 중 일부는 조선 왕조의 뿌리, 준경묘와 연경묘를 찾는다. 두 무덤은 왕릉 수준으로 잘 보호되고 있으며 조선 사직을 낳은 명당이라고 여겨 조선왕실의 애착이 컸다고 한다.

 전, 친구들과 환선굴로 가는 길에 준경묘를 들렀다. 나는 준경묘에 갈 때마다 목조 이안사의 인생 대장정이 생각난다. 한편, 척박한 활기리 산골마을에 살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명당자리에 부모님 묘를 쓴 지혜와 효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안사가 결정한 순간의 선택이 삼척 활기리가 조선 왕조의 뿌리가 되었으며, 조선 왕조 500년을 좌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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