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가끔 마음속으로 그리던 '다산초당'을 찾아갔다. 다산초당을 향해 오솔길을 오르면서 옛적 이곳을 오르내렸을 다산 선생과 그의 제자들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약 15분 정도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니 '茶山草堂(다산초당)'이 나타났다. 다산초당 현판의 글씨체가 특이하였는데,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체라고 한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고, 함께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다산초당에서만 10년간 긴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그분의 한(恨)이 지금도 다산초당에 서려있는 듯했다.
역경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다산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18년의 긴 세월 동안 부인 홍 씨는 물론, 어린 자식들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게 나날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산 선생의 본관은 나주 정 씨고 진주 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 씨 사이에 경기도 광주 마현(현 남양주 서종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다고 한다.
15세 때, 한 살 연상인 풍산 홍 씨 홍혜완과 결혼하였으며 공교롭게 1836년 회혼일에 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인 홍 씨는 2년 후, 1838년에 남편이 있는 하늘나라로 갔다.
다산은 결혼 후, 힘든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 마침내 28세에 대과 2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정조의 신임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나랏일이 분주해 부부간의 따뜻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화성을 축조할 때 사용한 거중기를 개발하고 배다리를 설계한 인물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개혁자다.
천주교 신자를 탄압한 신유박해의 피해자인 다산은 귀양살이를 하기 위해 천리 먼 길, 전라도 강진으로 떠났다. 부인과 자식을 이별하고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이 떠나는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 홍 씨는 세 살짜리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미어지는 다산은 아래의 시를 지어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을 부인에게 전했다.
산바람 불어와 가랑비 뿌리는데
서로가 가기 싫어 망설이는 듯하구나
주저하고 망설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끝내 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을
다산이 강진으로 떠날 때, 3살이던 막내는 다음 해에 요절하였고 부인 홍 씨는 통곡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다산은 솟구치는 슬픔을 참고 두 아들에게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라고 편지를 써 당부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도착하여, 머무른 곳은 사의재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방이다. 그곳에서 예학 연구를 시작하고,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과 목리 이학래 집으로 전전하면서 8년 동안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러다 외가 집안, 해남 윤 씨 도움으로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고, 1,000여 권의 서적을 읽으며 유교 경전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다산초당의 10년 세월과 함께 18년의 세월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이때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저술의 대부분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현으로 돌아왔을 때가 1818년 가을이었다. 젊은 나이에 귀양을 떠나 57세에 마현에 돌아온 그의 모습은 초로의 늙은이였다. 1836년 75세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마현에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강진으로 떠난 남편과 이별한 지 7년이 지났을 때다. 부인 홍 씨는 남편에게 보낼 애절하고 그리움을 담은 다음의 시를 지었다.
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깊어지네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이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대와 이별한 지 7년
서로 만날 날이
아득하기만 하구나
부인은 이 시와 함께 시집올 때 입었던 빛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있는 남편에게 보냈다. 이때가 다산과 부인 홍 씨의 결혼 30주년 되는 해였다.
다산은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곱게 접어 보냈을 치마를 잘라서 하피첩(하피란 저녁노을 빛깔의 여자 치마를 가리키는 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서첩을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냈다. 이 서첩의 내용은 선비가 가져가야 할 마음가짐, 남에게 베푸는 삶의 가치, 삶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물리치는 방법 등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철학과 인생의 지침이 되는 글이다. 하피첩에 있는 글귀는 다음과 같다.
몸 져 누운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내왔구나
천리 먼 곳에서
애틋한 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이 이미 바랬으니
늙은 나이에 서러운 생각마저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수첩 만들어
아들에게 일깨워 주는
글귀를 적어 보았구나
부디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그리고 2년 뒤 1812년, 다산은 모처럼 기쁜 소식을 접했다. 어엿한 숙녀가 된 외동딸이 아버지의 오랜 벗,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딸을 위해 부인 홍 씨가 보낸 빛바랜 다홍치마에 화조도를 그려서 딸에게 보냈다.
흰 매화꽃가지에 새 두 마리가 다정하게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부부가 평생 한 곳만 바라보고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는 눈물겨운 선물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에서 때론 절망과 좌절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쓰기 좋은 기회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고난을 마침내 극복한 것이다. 그의 철학과 사상은 부국강병이고 저술한 책의 내용도 그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힘든 유배생활 중에도 부인을 극진히 사랑하고 아끼는 남편이었다. 한편 아들에겐 남겨줄 전답은 없으니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근(勤)과 검(儉) 두 글자를 전답 대신 주겠노라고 말한 스승과 같은 아버지이고, 딸에게는 물건을 대신하여 사랑과 정이 담긴 그림을 보내 결혼을 축하해 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젊은 나이로 18년의 깊은 밤을 홀로 지새우며 지아비를 그리워했을 부인 홍 씨를 생각하면 애틋한 마음이 든다. 얼마나 외롭고 그리움이 사무쳤으면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내 본인의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시키고,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했을까? 마음이 애잔하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 나라가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 병을 지금 당장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36년 다산이 눈을 감고 74년이 지난 1910년, 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다산은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절약이고 공직자의 기본은 깨끗한 마음이라고 했다.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 약 2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천주교 신자를 박해한 역사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은 선거철이 되면 위정자들이 천주교 지도자들을 찾아가 허리를 굽히고 인사하는 모습을 볼 때 격세지감을 느낀다.
신유박해로 처형된 100여 명의 신자와 유배당한 400여 명의 억울한 영혼은 누가 위로해 주어야 하는지? 치유될 수 없는 슬픈 역사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다. 위정자들은 국가의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으로 국민을 잘 섬겨야 하고 또한 국민도 늘 깨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국가가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가 입증해 주었다.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은 다산 선생과 같이 '근(勤)'과 '검(儉)'이란 정신적인 가르침이 물질보다도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