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서루와 송강 정철

by 홍만식


'죽서루 아래 흐르는 오십천이 태백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 동해로 들어가니, 그 물줄기를 임금이 계신 한강으로 돌려 목멱(남산)에 닿게 하고 싶구나. 관원의 길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 나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하다. 나그네 시름을 달랠 길 없네. 신선의 뗏목을 띄워서 북두성과 견우성으로 향할까, 신선을 찾으러 단혈에 머무를까?'


이 글은 송강 정철(1536~1593년) 지은 관동별곡 가운데 죽서루와 오십천을 노래한 가사다.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의 직함을 받고 부임한 송강 정철이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면서,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정철은 금강산을 구경한 후, 의상대, 경포대를 거쳐 바다를 감상한다. 그리고 달빛 아래서 술을 마시고, 신선이 되는 꿈을 꾼다. 마지막 경유지, 죽서루에서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표현하고, 나그네의 시름과 갈등도 묘사하였다.


죽서루는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절벽 위에 자리한 누각으로 보물 213호다. 관동팔경은 관동지역의 뛰어난 경관 속의 누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8곳을 지칭한다. 그중에서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으뜸이다.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 서 있으며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바다를 향하지 않고 내륙의 산을 바라본다. 누각의 규모도 제일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우리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가 고려말에 죽서루를 창건했다고 배웠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3년 삼척 부사, 김효손이 누각을 중창한 이래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의 건축 구조는 현대 건축가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연구 대상이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1층에는 길이가 모두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중 8개는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우고 나머지 9개는 자연석 위에 세웠다.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세웠다고 하여 '덤벙 주초'라고도 한다. 그 위 누대에는 20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 사이의 벽이나 창호문이 없이 모두 개방되었다. 죽서루는 이전 건축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천진하고 자연스럽게 지어진 우리 건축의 자랑이라고 한다.

어느 작가는 죽서루의 자연석 위에 놓인 기둥, 덤벙 주초처럼 인생을 편하게 덤벙덤벙 살아야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 누각 안에는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제일계정(第一溪亭)은 조선시대 현종 3년 삼척 부사를 역임한 허목의 글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와 '죽서루(竹西樓)'는 조선 숙종 때 삼척 부사였던 이성조의 글이다. 숙종의 어제시와 율곡의 시를 비롯, 많은 시판이 걸려 있다.

내 고향은 죽서루가 있는 삼척이다. 어린 시절, 죽서루 아래 흐르는 오십천에서 수영을 배우고 은어 낚시를 즐겼다. 여름철에는 친구들과 함께 죽서루를 찾아 더위를 식히고 가끔은 죽서루 절벽을 내려가 오십천 맑은 물에서 물장난을 쳤다.


나는 1975년, 전투경찰에 입대하여, '서울시경찰국 여름경찰서'에서 수상인명구조대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 시절의 여름철엔 서울 시민이 한강 뚝섬과 광나루에서 수영을 하며 편하게 피서를 했다. 내 임무는 한강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것인데, 어떨 때에는 인명 구조에 실패하여 마음이 애잔했다. 당시 한강에서 인명을 구조한 보람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가끔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강원도 동해안으로 여행할 때, 나는 가이드를 자청해 스케줄을 짜고 동행자와 함께 죽서루에 간다. 그곳에서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면 옛 추억이 떠오르고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이 생각난다. 그리고 죽서루 공원에 있는 관동별곡 가사비를 읽으면, 송강 선생이 신선이 되어 지금도 시를 노래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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