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게 쉬고 오지게 놀았습니다.
공부하러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이제 슬슬 해볼까 하고 각 잡고 앉아서 보니 그동안 쓴 게 전혀 없네.
이제 좀 레귤러 하게 만나야 하지 않겠니? 매달 말에 와라
라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게 5월 중순인데 당연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함.
5월에는 학과에서 논문작성 세미나를 지원해 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심히 학교에 나갔다.
박사졸업 선배님이 봐주셨는데, 내 주제가 굉장히 낯설으셨을 텐데도 굉장히 열정적으로 코멘트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걱정하시더니 3주 만에 나랑 토론을 하실 만큼 내 주제를 파악하시고 핵심을 짚으셔서 놀랐음. 나는 4년을 붙잡고 있었던 건데?? 이때 완성했던 개요문을 교수님께 드렸어야 했다. 그땐 내가 이렇게 까지 팽팽 놀아버릴 줄 몰랐지.
6월에는 진짜 뭘 했더라... 일을 많이 했고, 공연을 많이 봤다.
5.4 연극 <벚꽃동산>
5.17 연극 <폭풍의 언덕>
5.23 뮤지컬 <SIX>
5.24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6.2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6.8 연극 <우리 교실>
6.15 연극 <리어왕>
7.9 연극 <결투>
7.13 뮤지컬 <트레이스 유>
정리해놓고 보니 6월에만 많이 본건 아니네. 본 것들 중에서는 <우리 교실>, <결투>가 좋았다. 전자는 파토스, 후자는 로고스. 관악극회 프로덕션 <리어왕>에 대해서는 할 말이 굉장히 많은데, 이거 쓰다간 오늘 공부도 종 칠 것 같으니 생략. 아, 오래간만에 영화관도 갔다. <엘리멘탈>을 봤는데 살짝 실망스러웠어. 지난 4년여간 정말이지 공연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 아예 관람을 끊어버렸었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나 보다. 이로써 나의 '공연못봄병'은 번아웃으로 인한 인지능력 및 집중력 저하 때문이었음이 판명되었고, 드디어 쾌차했다. 노느니 공연이라도 열심히 봐두자 해서 본 건데, 공연 관람이 이번 내 논문에 직접 도움은 안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네. 그래도 언젠간 자양분이 되겠지. 구슬 모으는 게 내 취미니까. 모아두면 언젠가는 꿰어낸다!
난생처음 호캉스도 다녀왔다. 졸업하기 전까진 아무래도 여행은 못 가니 분위기나 내자하고 집에서 45분 거리호텔로ㅎㅎ 체크인해 놓고 일하고 다시 들어가는 바람에 온전히 휴가 기분은 못 냈지만 그래도 꽤 기분전환이 되었다. 입 짧은 엄마가 조식뷔페에서 열빙어를 왕창 드시는 걸 보고 뿌듯했음. 1년에 한두 번씩은 다녀야겠다. 이렇게 쉬운걸.
7월부터는 진짜 좀 해보자 하고 맘을 먹었는데 일주일 만에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오죽 아팠으면 일어나자마자 눈도 못 뜨고 병원에 갔겠어. 코로나 때도 통증이 사흘을 넘기진 않았는데, 이 감기는 진짜 질긴 놈이어서 일주일을 내리 쉬었다. 잔기침까지 해서 팔월 초까지 한 달은 앓았나 보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 내 7월 누가 뺏어감?
그리고 8월이 되었다.
논문제출기한을 초과해서 연장서를 냈는데 6학점 추가에 등록금도 내야 한다는 건 몰랐지. 공부 시작한 이래 첨으로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다. 근데 다행히도 나는 제출기한 초과자가 아니라 제출기한 연장대상자라서 수업이수+등록금은 해당 없다고. 이제 연장을 해서 2년을 벌었고, 그 2년마저 초과하면 수업이수+등록금, 이런 코스인 것 같다. 살았다. 그렇게 지옥과 천당 사이에서 울다가 교수님께 연락을 받았다. 쓴 거 가지고 다음 주에 오라고 하신다. 세상에, 생전 간섭 안 하시고 잔소리 안 하시는 교수님께서! 알아서 잘하겠거니 뒀는데 이렇게까지 망나니같이 굴 줄은 모르셨겠지요...
14일 월요일 안에는 무조건 개요문을 교수님께 제출할 것! 그리고 남은 보름간 논문을 완성할 것! 하룻밤새 만리장성을 걷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계획이지만, 근자감이 샘솟는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이미 한 것 같은 기분이야. 나도 내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이상한 상태의 8월 13일이다.
천재는 아니지만 나는 능히 해낼 것이고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