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연출가 김현탁

극단 성북동비둘기

by 아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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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한국 연극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실험 연극의 선구자 김현탁은 종종 폴란드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Marian Grotowski)에 비견되곤 한다. 무대 장치, 조명, 분장, 의상 등 부차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연극의 본질에 집중하는 김현탁의 작업은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과 유사한 예술적 지향을 공유한다. 그러나 김현탁은 이를 현대적으로 재맥락화하고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김현탁의 작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텍스트와 공연의 관계를 정립하는 방식이다. 그는 기존 희곡이나 텍스트를 절대적 권위를 지닌 대상이 아닌, 공연을 위한 ‘재료’로 활용한다. <천기누설 킹교인>(2019)에서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지라는 핵심 주제만을 추출했고, <걸리버스>(2022)에서는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설정만을 차용하였다. 이처럼 원작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그의 연출 방식은 주로 고전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김현탁의 해체는 원작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닿기 위한 시도이며, 재구성은 원작이 품고 있는 심층적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맥락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원작의 문학적 내러티브는 해체되지만, 텍스트의 핵심과 본질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현탁의 해체와 재구성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작의 의미를 보존하되 그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확장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김현탁 연출의 또 다른 특징은 배우의 신체성과 현존에 대한 강조이다. 그의 작품에서 배우들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강렬한 신체성을 드러냄으로써 극적 의미를 창출한다. <세일즈맨의 죽음>(2011)에서 윌리 로먼 역의 배우가 70여 분간 러닝 머신을 달리는 장면, <걸리버스>(2022)에서 배우들이 장시간 노를 젓는 장면 등은 관객에게 강렬한 감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그로토프스키의 '성스러운 배우'가 극단적인 신체 훈련을 통해 자아를 비우고 순수한 현존을 추구했다면, 김현탁의 ‘생동하는 배우’는 반복적이고 고단한 신체 행위를 통해 관객과 감각을 공유한다.


김현탁은 관객과의 관계에서도 혁신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관객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공연의 의미를 완성하는 능동적 참여자로 자리한다. <바이 사이클>(2014)에서 관객들이 자전거 페달을 직접 돌려 공연장의 조명을 밝히도록 한 장치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공동체의 책임과 존재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이를 통해 김현탁 작품에서 관객은 감각적 체험의 주체이자 공연의 에너지와 의미를 생산하는 협력자가 된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김현탁의 연극은 포스트 드라마*의 형식을 띠지만, 내적으로는 희곡의 문학성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그의 연극은 텍스트와 공연, 배우와 관객 사이의 기존 질서를 해체하면서도, 여전히 공연예술로서의 연극이 지닌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실험을 넘어, '연극'이라는 틀 안에서 혁신을 모색하는 그의 예술적 지향을 보여준다. 김현탁의 연극들은 연극의 외연을 확장하고 동시대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예술적 기여이자, 한국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김현탁의 예술적 실천은 가장 적은 것으로 가장 깊은 것을 표현한다는 미적 원칙을 통해 역설적으로 연극의 핵심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냄으로써 배우와 관객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연극 예술만의 현재성을 복원하고 순수한 연극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로토프스키가 추구했고, 김현탁이 탐색하고 있는 연극의 본질이자 정신이다.



*포스트 드라마: 포스트 드라마 연극이란 희곡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탈희곡적 연극의 통칭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연극은 갈등과 해결의 서사구조를 기반으로 구축된 문학의 한 갈래인 희곡을 무대 위에 재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텍스트의 권위가 허물어지면서, 연출가들은 희곡 중심의 기존의 연극에 반기를 들고 연극의 본질을 문학성이 아닌 연극성에서 찾고자 했다. 20세기 후반부터 도드라지게 등장한 이러한 경향의 연극을 가리켜 독일의 연극학자 한스 티스-레만(Hans-Thies Lehmann)은 “포스트 드라마 연극”이라 명명하였다. 포스트 드라마 연극이란 용어는 단순히 시기적인 관점에서 ‘희곡 이후의 연극’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인식론적 관점에서 ‘탈텍스트적 연극’을 뜻한다. 포스트 드라마 연극은 완성된 서사구조나 고정된 의미를 지닌 작품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업을 선호하므로 여기서 관객은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발견하고 창출하는 능동적 행위자가 된다.



참고문헌

김기란. 「2000년대 한국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공연텍스트 구성 과정의 실증적 고찰 - 확장된 각색을 통한 무대 위의 글쓰기, 극단 성북동비둘기 김현탁의 연출 작업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1, no. 56 (2015): 239-272.

Lehmann, Hans-Thies. Postdramatisches Theater. Aufl.. Frankfurt am Main: Verlag der Autore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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