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성북동비둘기 <알바의집, 배로나르다>(20205)
산업화 시대가 제시한 삶의 공식은 단순하고도 분명했다. 현재의 노고는 미래의 안정으로 돌아올 것이며, 성실한 노동은 사회적 상승을 보장한다는 믿음. 이러한 ‘지연된 만족’의 논리는 개인에게 현재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동기부여 장치로 작동했고, 20세기를 관통하며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그러
나 그 실상은 오래전부터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베르나르다의 딸들이 적절한 남편을 만날 때까지, 상복을 벗을 때까지, 사회적 체면을 지킬 때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질식해 갔듯, 지연된 만족의 세계는 이미 삐걱거리고 있었다.
오늘날 그 한계는 더욱 선명해졌다. AI와 자동화 기술의 급속한 확산으로 숙련 노동자들마저 대체 가능한 영역으로 밀려나고 있고 안정적인 일자리라는 개념은 허상이 되어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불안정 노동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은 더 이상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복합적이다.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감내하면서도 동시에 가사와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까지 떠안아야 한다. 유급 노동에서는 승진 기회를, 무급 노동에서는 아이가 자라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며 지연된 만족 구조에 이중으로 갇혀버린다. 결국 과부하만 지속되고 약속된 미래는 계속 연기될 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삶 자체를 수단화한다는 점이다. 현재는 오직 미래를 위한 도구로만 취급되고 과정의 가치는 결과에 종속된다. 그러나 결과만을 위해 과정을 희생할 때 우리는 삶의 본질적 의미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핵심은 불확실한 미래에 의존하는 삶의 패턴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이는 내일만을 위해 오늘의 나를 소모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과 관계에서 의미를 찾는 관점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런 접근은 체념이나 현실 도피가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현실적 대응이며 인간다운 삶을 지키려는 적극적 전략이다.
물론 이런 접근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월세와 생활비는 여전히 현실적 압박으로 다가오고, 의료비와 노후 준비 같은 장기적 계획을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불안정한 현실에 대한 개인적 대응이 자칫 구조적 변화에 대한 요구를 무력화시킬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개인의 태도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불충분한 사회보장 같은 근본적 문제들이 가려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부당한 구조에 대한 거부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는 허상에 기대어 당장의 부당함을 감내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진다. 과도한 업무량과 야근 문화에 맞서 적정 노동시간을 지키려는 노력, 위계적 소통 관행을 거부하고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시도, 동료의 권리 침해에 침묵하지 않는 연대 의식. 이러한 일상적 실천들은 개인의 근로 환경을 개선할 뿐 아니라, 주변으로 확산되어 노동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불안정 노동자들이 서로의 처우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여성들이 가사와 돌봄 부담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부당한 대우에 집단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때, 그것은 사회 전체의 노동 관행을 바꾸는 동력이 된다.
지연된 만족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은 당장의 삶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새로운 관점이다. 우리의 자유는 저 멀리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불안정한 바다를 항해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움튼다. 그 항해를 혼자 하기란 어렵다. 같은 현실을 마주한 동료들과 함께, 서로의 방향을 확인하고 풍랑을 함께 헤쳐 나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하다. 이것이 불안정 노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모색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항법일 것이다.
연극 <알바의집, 배로나르다>(2025) 프로그램 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