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에필로그

by 한시을

에필로그: 어머니가 남긴 것들


유하사에서 49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 위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7주 동안 써 내려간 행장록이, 단순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기록이 아니었다는 것을. 21회 차에 걸쳐 어머니의 20대부터 80대까지를 따라가며, 나는 예상치 못한 발견들을 하게 되었다.


1943년생 어머니의 82년 인생은 곧 대한민국 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외환위기와 4차산업혁명시대까지. 어머니는 이 모든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살아오셨다. 하지만 동일한 시대역사를 써내려간 역사책에는 어머니 같은 분들의 이야기가 없다. 대통령과 재벌,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20대 어머니를 쓰면서 놀랐던 것은 1960년대 안동 여성의 현실이었다. 19세에 결혼해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성당 근처에서 "맨날 국수만 먹던" 그 시절. 가난했지만 "조금만 참으면 곧 밥을 먹을 수 있거야"라고 아들을 다독이던 어머니의 말씀에서, 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여성들의 고단함과 희망을 보았다.


30대 어머니는 더욱 놀라웠다. 적산가옥의 다다미방을 매일 정성스럽게 관리하시고, 네 아들이 뛰어노는 집에서 "다다미 위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라고 당부하시던 그 섬세함. 막내의 교통사고로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셨던 그 의지. 이것이 1970년대 한국 어머니들의 진짜 모습이었다.


40대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셋째를 잃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무너지지 않으셨다. "보통 엄마들 같으면 아들이 죽었다면 뒤로 넘어져 정신이 혼미할 텐데, 어머님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장례식 내내 꼿꼿하게 손님들을 접대하셨어요"라는 아내의 증언이 그 시대 여성들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50대 어머니의 25년 시장 생활은 대한민국 서민 경제사의 산 증인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시며 세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신 그 시간들. "밥장사해서 벌어들이는 돈이라고 해봐야 어디 대도시 젊은이 한 달 봉급만 하겠니?"라고 하시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이것이 1980-90년대 한국의 진짜 교육열이었다.


60대와 70대는 또 다른 발견이었다. 손녀들이 사범대와 의대에 진학하자 "우리 손녀가 교사가 되고 의사가 된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 "요즘은 여자들도 공부를 잘해야 하는구나"라고 인식을 바꿔가시던 그 유연함. 73세에 "딸들은 시집가면 그 집안사람이야"라던 전통적 여성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통영 여행에서 요트를 타며 "아이고, 이게 배야? 이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이네"라고 소녀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시던 77세의 어머니. 미륵산 정상에서 "내가 이런 걸 다 보고 죽는구나"라고 감탄하시던 그 순간. 어머니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다가 70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기쁨을 맛보셨다.


21회 차를 쓰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어머니의 적응력이었다. 해방 후 혼란기부터 정보화 시대까지, 어머니는 매 순간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오셨다. 1960년대 신혼부부에서 1970년대 네 아들의 어머니로, 1980년대 시장 상인에서 2000년대 할머니로, 2010년대 여행을 즐기는 액티브 시니어까지. 어머니의 인생은 한국 여성사의 축소판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변화에 굴복하지 않는 적응력이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묵묵히 짐을 챙기고, 새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넣는" 일상의 힘. 이것이 어머니가 보여주신 진짜 강인함이었다.


둘째는 말하지 않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더 강력한 것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이었다. 성당 근처에서 국수만 먹으면서도 "조금만 참으면 곧 밥을 먹을 수 있거야"라고 다독이던 그 사랑, 25년간 시장에서 일하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하신 그 헌신이 진짜 사랑이었다.


셋째는 시대를 읽는 지혜이다. 73세에도 손녀들의 성취를 보며 자신의 인식을 바꿔가신 어머니.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이것이 어머니가 82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넷째는 일상의 성실함이다. 80대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안을 정리하고, 계절에 맞는 음식을 준비하며, 가족들의 안부를 챙기시던 그 규칙적인 일상. 화려하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 그 성실함이 가족의 뿌리였다.


이제 나는 안다. 프롤로그에서 어머니가 하지 못하신 "내가 너희들 키울 때, 제일 힘들었던 건 말이다..."의 답을. 어머니에게 제일 힘들었던 것은 물질적 어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외로움마저 사랑으로 승화시키셨다.


어머니의 개인사는 곧 역사다. 1943년부터 2023년까지 82년간 한국을 살아낸 한 여성의 기록이 바로 우리가 후대에 전해야 할 진짜 역사다.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의 기록이,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삶이 진짜 역사의 힘이다.


어머니가 심어주신 사랑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다. 막내가 조카들을 돌보는 모습에서, 둘째가 묵묵히 일하는 모습에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마음 쓰는 순간에서 어머니를 본다. 그리고 그 사랑은 손자 손녀들을 거쳐 또 다른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21회 차를 쓰면서 깨달았다. 기록이라는 것의 놀라운 힘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글로 쓰는 순간 선명하게 드러났다. 20대의 어린 신부가 어떻게 80대의 지혜로운 할머니가 되었는지, 그 변화의 과정이 한 편의 대하소설처럼 펼쳐졌다.


기록은 추억이 필요할 때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계단이자, 어둠 속에서 길을 비추는 등대다. 무너진 마음을 세우는 희망이고,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두려울 때 포기하지 않고 용기있게 나가도록 하는 격려이며, 외로울 때 곁을 지켜주는 벗이다. 어머니의 82년이 이제 글자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며, 언젠가 이 이야기를 읽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까지 그 지혜가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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