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AJIM 모델의 해법 – 사유의 복원과 통의 개혁
대한민국 국가공무원법 제57조. 1949년 제정 이후 76년간 유지된 조항이다.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¹
단 한 줄이다. 하지만 이 한 줄이 수십만 명의 공무원이 매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규정했다. 복종하라. 판단하지 마라. 상관이 명령하면 수행하라. 왜 명령을 내렸는지, 그 명령이 합법적인지,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은 공무원의 역할이 아니었다.
2025년 11월 25일. 인사혁신처가 이 조항을 삭제하겠다고 발표했다. 76년 만이었다.² 발표의 핵심은 단순히 조항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공무원이 상관의 위법한 지휘·감독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거나, 이행을 거부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는 것이었다. 명령과 복종의 시스템에서 대화와 토론의 시스템으로의 전환. 인사혁신처는 이것을 "충직·유능·청렴에 기반한 활력있는 공직사회"라고 표현했다.
이 발표가 왜 중요한가. AJIM 모델의 언어로 읽으면,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무사유를 법제화한 조항이었다. "복종하라"는 명령은 "생각하지 말라"의 다른 표현이다. 아이히만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논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법을 따랐다. 상관의 명령을 수행했다. 절차를 준수했다.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한국 관료제 전체에 이 논리를 법적 언어로 새겨 넣었다.
76년 동안이다. 1949년부터 2025년까지. 이 기간 동안 수천만 명의 공무원이 이 조항 아래서 일했다. 검사도, 경찰도, 행정 관료도, 군인도. 그들 모두에게 복종은 의무였다. 사유는 선택이었다. 아니, 선택이기는커녕 종종 위험이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니까. 아이히만이 "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처럼—나치 독일의 법 체계 안에서 그는 실제로 법을 따랐다—한국 공무원들도 제57조 아래서 실제로 법을 따르며 복종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법 자체가 무사유를 요구했다는 것이.
복종의 의무가 만들어낸 관료의 인간형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분석하며 한 가지 역설을 발견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법을 따랐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법보다 상관의 명령을 더 충실히 따랐다. 법과 명령이 충돌할 때, 아이히만은 명령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복종"이라고 불렀다. 법적 근거가 있는 복종. 자신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 단지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했다. 이 논리가 공무원을 보호한다. 개인의 책임을 시스템으로 이전한다.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바로 이 이전을 가능하게 했다. 상관이 위법한 명령을 내렸을 때, 공무원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복종하거나, 복종하지 않거나. 그런데 복종하지 않으면 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제57조가 복종을 의무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위법한 명령을 거부한 공무원은 징계받을 수 있었다. 위법한 명령에 복종한 공무원은 "법을 따랐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구조가 76년간 작동했다.
12장에서 분석했던 관료제의 탈개인화 메커니즘이 여기서 법적으로 완성된다. 제복과 서열이 개성을 지우고, 상명하복이 판단을 제거하고, 복종의 의무가 책임을 분산시킨다. 관료는 명령의 전달자가 된다.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품이 된다. AJIM 모델의 BN 유형이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2026년 3월,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이 피해자를 "허들(Hurdle)"—넘어야 할 장애물—이라고 칭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언어는 단순한 실언이 아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처리해야 할 행정 절차의 걸림돌로 인식하는 관료적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서 발견한 것—피해자를 탈인간화하는 관료적 언어—이 2026년 한국 관료 조직에서 다시 출현한 것이다.¹² 이것이 76년간 "복종하라, 판단하지 마라"를 반복한 구조가 만들어낸 인간형이다. 법이 사유를 억압했고, 문화가 사유를 배제했다. 그 결과 관료의 언어에서 인간이 사라졌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을 수행한 군인들이 국회 담장을 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나중에 증언했다. "명령을 받았습니다." 위법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복종이 의무였다. 이것이 국가공무원법 제57조와 관료제의 다윈주의가 함께 만들어낸 인간형이다. 명령을 받으면 수행한다. 그것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다. 아이히만의 논리와 동일하다. 76년간 법으로 보호받고, 조직 문화로 강화된 논리다.
저항의 역사: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
그런데 모든 공무원이 복종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AJIM 모델이 주목하는 것은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한 BT 유형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관료제의 역사에도 그 사람들이 있었다.
1990년. 감사원 이문옥 감사관은 국방부와 방위산업 업체 간의 유착 비리를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자 언론에 제보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공무원 기밀 누설죄로 구속, 파면. 이문옥 감사관은 6년간 법정을 오갔다. 1996년 4월. 대법원이 판결했다. "이를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면 무죄다." 무죄 판결, 복직.³ 하지만 6년이었다. 그 6년 동안 이문옥 감사관은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가족이 있었고, 생활이 있었고, 명예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6년간 법정 투쟁에 걸었다.
1990년 10월. 육군 소속 윤석양 이병이 양심선언을 했다. 국군보안사령부가 민간인 1,300여 명을 불법으로 사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었다. 결과는 수배. 2년간의 도피 끝에 1992년 9월 체포되어 군 사법부에서 2년형을 받았다.³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군보안사령부는 기무사령부로 개편됐다. 구조가 일부 바뀌었다. 하지만 폭로자는 처벌받았다. 민간인 1,300명을 불법으로 사찰한 기관은 이름을 바꾸고 존속했다. 폭로자는 징역을 살았다.
1992년. 이지문 중위는 군에서 투표 부정이 이루어졌음을 고발했다. 즉각 이등병으로 파면. 4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1995년 파면 처분 취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³ 중위 신분으로 명예 전역했다. 그가 얻어낸 것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등병이 아닌 중위의 지위—이었다. 4년을 싸워서 원상 복귀됐다. 이것이 한국 관료제가 내부 저항자에게 제시한 조건이었다.
이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조직에서 일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위법하거나 공익에 반하는 조직의 명령·관행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독한 보복을 받았다. 구속됐다. 수배됐다. 파면됐다. AJIM 모델의 언어로 읽으면, 이들은 나쁜 통 속에서 사유를 멈추지 않은 BT 유형이었다. 조직의 논리에 흡수되지 않고, 더 높은 기준—공익, 헌법, 도덕—에 따라 판단했다. 그 선택이 그들에게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이 문제다. 사유하는 공무원이 영웅이 아니라 피해자가 되는 구조. 복종하는 공무원이 안전하고, 저항하는 공무원이 위험한 구조. 이 구조가 76년간 유지됐다.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
공익신고자보호법: 불완전한 시작
2011년 3월 29일.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제정됐다. 공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신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다. 비밀 보장, 불이익 조치 금지, 신변 보호, 보상금 지급. 한국 내부 고발자 보호 체계의 첫 번째 종합적 입법이었다.⁴
효과가 있었다. 2011년 국민권익위원회에 접수된 공익신고는 292건이었다. 2022년에는 3,266건이 접수됐다. 10여 년 만에 10배 이상으로 증가했다.⁵ 2024년 1월에는 공익신고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 상한을 폐지하는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⁶ 내부 고발에 대한 금전적 유인이 더 커졌다. 신고 건수의 증가는 제도가 조금씩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법이 현실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JTBC 뉴스룸 보도에 따르면, 내부 고발자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⁷ 법적 보호와 실제 보호 사이의 간극이다. 신고 건수가 늘어도, 신고자들이 여전히 극단적 고통을 호소한다면 그 제도는 미완성이다.
왜 간극이 생기는가. 내부 고발자가 겪는 보복의 양상을 살펴보면 이해된다. 업무 성과와 관계없이 사직이나 퇴직이 종용된다. 한직으로 인사 배치된다. 내부 고발 내용을 이유로 "위계 질서 문란", "비밀 유출"로 징계받는다. 동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법적 보복—민형사상 소송—을 당한다.⁷ 이 중 많은 것들이 공익신고자보호법의 보호 범위 안에 있다. 하지만 법적 보호를 받으려면 소송을 해야 한다. 이문옥 감사관은 6년이 걸렸다. 이지문 중위는 4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내부 고발자는 법적 투쟁과 생활고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 억제력이다.
또 다른 구조적 문제가 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은 기명 신고를 원칙으로 한다. 익명 신고는 허용되지 않는다.⁸ 신고자는 자신의 신원을 밝혀야 한다. 조직 내부에서 상관이나 동료를 고발하는 공무원이 익명으로 신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내부 고발의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다. 한국을 포함한 OECD 국가 연구에 따르면, 신고를 하지 않는 이유로 39%는 "신고해도 별다른 조치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30%는 "자신의 경력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답했다.⁹ 법이 있어도 신고하지 않는다. 현실적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책임의 재분배: 누구의 문제인가
사유하는 공무원을 만들기 위한 두 번째 과제는 책임의 재분배다. 현재 한국 관료제의 책임 구조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공무원이 상관의 지시를 따라 위법한 행위를 했을 때, 누가 책임을 지는가. 이것이 오랫동안 불명확했다. 대법원 1996년 전원합의체 판결(95다38677)은 공무원 직무상 불법행위의 경우 국가 또는 공공단체만이 피해자에게 국가배상법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고, 공무원 개인은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는 경우에도 피해자에 대해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¹⁰ 즉, 공무원 개인은 면책된다. 책임은 국가가 진다.
이 구조가 무사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공무원 개인은 자신의 판단이 야기한 결과에 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국가가 대신 책임진다. 상관의 지시를 따른 결과에 대한 개인 책임이 없다면, 상관의 지시가 옳은지 판단할 유인도 줄어든다.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복종하면 된다. 결과는 국가가 책임진다. 이 구조가 BN 유형 공무원을 제도적으로 보호한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공무원의 개인 책임을 민사 손해배상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과, 형사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르다. 위법한 명령에 복종하여 시민에게 해를 끼친 공무원에 대한 형사 책임은 여전히 가능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이것을 확립했다. "명령을 따랐을 뿐"은 형사 면책 사유가 되지 않는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을 수행한 군인들과 경찰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 것도 이 원칙에 따른다.
이것이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주장한 논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는 법을 따랐다. 국가의 명령을 수행했다. 개인적 책임은 없다." 뉘른베르크 재판부가 이 논리를 거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의 명령도, 상관의 지시도 개인의 판단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사유하는 공무원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공무원이다. 이것을 제도화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위법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의 보장이다. 2025년 11월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이 바로 이것을 시도한다. 상관의 위법한 지휘·감독에 대해 이행을 거부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위법한 명령에 복종한 공무원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 없이 사유는 자라지 않는다. 29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의 판단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직면하는 경험이 사유를 만든다.
관료제의 다윈주의: 순응자가 살아남는 구조
왜 공무원들은 사유하지 않는가. 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조직 문화의 문제가 있다.
11장에서 분석했던 검찰 조직의 상명하복 구조는 검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관료 조직에서 유사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조직에서 순응자는 살아남고, 저항자는 배제된다. 이것을 "관료제의 다윈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자연 도태처럼, 조직에 순응하는 유형이 살아남아 상위직에 오르고, 의문을 제기하는 유형은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스스로 떠난다.
이 메커니즘은 진화한다. 수십 년이 지나면, 조직의 상층부는 순응자들로 채워진다. 그 상층부가 다시 순응을 보상하는 구조를 재생산한다. 짐바르도가 말한 것처럼, 시스템은 스스로를 유지하고 강화한다. 개인을 바꿔도 시스템이 같으면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관료제의 다윈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승진 시스템이 순응을 보상한다. 상관의 마음에 드는 공무원이 승진한다. 상관의 마음에 들려면 상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의문을 제기하는 공무원은 "불화 요소"로 분류된다. 둘째, 인사 배치가 저항을 처벌한다. 이의를 제기한 공무원은 한직이나 지방으로 전출된다. 내부 고발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원치 않는 전출"이다.⁷ 셋째, 집단 규범이 형성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암묵적 규범이 생긴다. 새로 들어온 공무원은 이 규범을 배운다. 저항은 규범 위반이다. 규범 위반자는 집단에서 배제된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작동할 때, 관료 조직은 사유하지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최적화한다. BN 유형 공무원이 늘어나고, BT 유형 공무원이 줄어든다. 이것이 AJIM 모델이 경고하는 무사유의 구조적 전염이다.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불법 사찰을 폭로했을 때, 그 사찰 행위에 가담한 수백 명의 군인들은 폭로하지 않았다. 이문옥 감사관이 방산 비리를 내부 제보했을 때, 그 비리를 알았던 다른 수십 명의 감사관들은 침묵했다. 이것이 관료제의 다윈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다.
2024년 12월 3일 계엄 선포 이후 드러난 것들이 이것을 보여준다. 계엄에 동원된 군인들, 국회 봉쇄에 참여한 경찰들, 불법 계엄 명령을 집행한 관료들. 많은 이들이 나중에 "명령을 따랐다"고 진술했다. 그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수십 년간 관료제의 다윈주의 속에서 순응자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나쁜 통이 만들어낸 BN 유형이었다. 그들에게는 복종이 직업 생존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제57조가 그 복종을 의무로 못 박아 두었다.
그렇다면 이 관료제의 다윈주의를 어떻게 역전시킬 것인가. 단순한 해법은 없다. 하지만 방향은 있다.
사유하는 공무원의 세 가지 조건
그렇다면 관료제의 다윈주의를 역전시키는 방향은 무엇인가. 제도, 문화, 교육—세 개의 축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도가 바뀌어도 문화가 그대로면 법조문만 남는다. 문화가 바뀌어도 제도가 없으면 보호받지 못한다. 교육이 없으면 제도와 문화를 만들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첫째, 위법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2025년 11월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은 이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복종의 의무를 삭제하고, 위법한 지휘·감독에 대한 이행 거부를 명문화했다. 하지만 법이 문화를 바꾸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법이 바뀌어도, 거부했을 때 실제로 보호받는다는 경험이 축적되지 않으면 관료들은 여전히 복종을 선택한다. 2025년 12월 계엄에서 명령을 거부한 군인이 몇 명이나 됐는가. 거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두려움이 법 개정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조항은 종이 위에만 존재한다.
둘째, 내부 고발자가 실질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법적 보호와 실제 보호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익명 신고 허용이다. 익명 신고가 허용되지 않으면, 조직 내 보복을 두려워하는 공무원은 신고를 포기한다. 현행 공익신고자보호법 제8조는 기명 신고를 원칙으로 한다.⁸ 신원을 밝혀야 한다는 요건은 조직 내 고발의 가장 큰 장벽이다. 다른 하나는 보복 행위에 대한 입증 책임 전환이다. 현재는 내부 고발자가 보복을 당했음을 증명해야 한다. 반대로 고용주나 상관이 불이익 조치가 내부 고발과 무관함을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는 신속한 보호 절차다. 이문옥 감사관의 6년, 이지문 중위의 4년은 너무 길다. 신고 이후 신속하게 신변과 신분을 보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셋째, 저항하는 공무원이 경력상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한다. 더 나아가, 저항이 오히려 경력에 긍정적 신호가 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인사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한다. 상관의 위법한 명령을 거부한 공무원이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오히려 공익을 지킨 사람으로 평가받도록 해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불법 행위를 폭로한 공무원에게 대통령이 특별 공로증을 수여한다.⁹ 제도적 인정이다. 사유하는 공무원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정상적인 직업 행동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영웅이 필요한 사회는 아직 제도가 불완전한 사회다.
독일의 선택: 위법한 명령 거부 의무
독일의 사례가 참조점이 된다.
독일 연방공무원법(Bundesbeamtengesetz)은 공무원의 복종 의무와 함께 위법한 명령에 대한 거부 의무도 명시한다. 공무원은 상관의 명령이 형법상 위법하거나 기본법(Grundgesetz)에 위반된다고 판단할 경우, 그 명령을 이행해서는 안 된다. 위법한 명령을 이행한 공무원은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를 변명으로 쓸 수 없다.
이 조항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교훈에서 나왔다.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변명을 법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설계됐다. 독일은 아이히만의 논리가 다시 작동하지 않도록 법제도 자체를 바꿨다. 28장에서 살펴본 Macro 개혁—탈나치화—의 법적 측면이다. 개인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바꾼 것이다.
독일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철저한 역사 교육이 있었다. 독일 공무원들은 채용 과정과 재직 중 교육에서 나치 시대 관료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반복해서 학습한다. 아이히만 재판의 내용, 뉘른베르크 재판의 논리,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를. 이 교육이 독일 공무원들에게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공한다. 위법한 명령이 무엇인지, 언제 거부해야 하는지, 거부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한국의 2025년 11월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은 독일의 방향과 유사하다. 하지만 거부 권리의 명문화와, 거부 의무의 명문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거부할 수 있다는 것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다르다. 독일은 후자까지 나아갔다. 한국은 아직 전자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제도 변화와 함께, 왜 거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육이 없다면 법 개정은 종이 위의 조항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있다.
사유하는 공무원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 사유하는 공무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 개의 조건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제도다. 복종의 의무가 아니라 판단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위법한 명령을 거부해도 보호받는다는 제도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2025년 11월의 국가공무원법 개정과, 공익신고자보호법의 실질적 강화가 이 방향이다. 하지만 제도 변화는 시작일 뿐이다. 법이 선언하고, 판례가 뒷받침하고, 실제 경험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제도가 살아있는 보호 장치가 된다.
두 번째 조건은 문화다. 제도가 바뀌어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조직 내부에서 "저 사람은 위법한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영웅담이 아니라 정상적인 직업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제도 변화가 문화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스라엘의 대통령 공로증처럼, 저항을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문화 변화의 촉매가 된다.
세 번째 조건은 교육이다. 29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유의 능력은 교육을 통해 길러진다. 공무원이 되기 전에 멈추고 묻는 능력을, 책임지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공무원 임용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공직 윤리 교육이 단순한 규정 암기가 아니라, 실제 사례를 통해 판단력을 훈련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독일에서 공무원들이 아이히만 재판을 배우는 것처럼, 한국에서 공무원들이 이문옥·윤석양·이지문을 배워야 한다. 규정을 읽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직면하는 것이다.
AJIM 모델의 틀에서 보면, 사유하는 공무원이란 GT 유형에 가까운 공무원이다. 좋은 통(민주적 법치 구조) 안에서 사유하는 사람. 하지만 나쁜 통 안에서도 BT 유형이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문옥, 윤석양, 이지문. 이들은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제도가 불완전했음에도. 보복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이 BT 유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때문이었다. "이것이 공익에 맞는가"를 끝까지 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BT 유형으로 만든 것은 법이 아니었다. 사유였다.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영웅의 사유에만 의존하는 민주주의는 취약하다. 매번 이문옥 같은 사람이 나타나야 부패가 드러나는 사회는, 부패 구조를 해결하지 못한 사회다. BT 유형 영웅의 출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GT 유형 공무원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제도가 사유를 지원하고, 문화가 사유를 보상하고, 교육이 사유를 훈련하는 구조. 이것이 관료제 개혁의 방향이다. 이 세 가지가 함께 갖춰질 때, 이문옥과 이지문의 후계자들은 6년과 4년을 싸울 필요 없이, 그냥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사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민주주의 관료제의 모습이다. 영웅이 필요 없는 사회. 이문옥처럼 굳이 나서지 않아도, 위법한 명령이 자연스럽게 거부되는 사회. 그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30장이 가리키는 핵심 방향이다.
사유하는 공무원을 만드는 것은 이 질문—"이것이 공익에 맞는가"—을 관료제 안으로 다시 들여보내는 작업이다. 76년간 밖으로 내쫓은 이 질문을. 국가공무원법 제57조가 침묵시킨 이 질문을. 이제 다시 공직 사회 안에서 묻기 시작해야 한다. 그 질문이 살아있는 관료제는, 아이히만을 만들지 않는다. 그 질문이 죽어있는 관료제는, 피해자를 "허들"이라 부르는 이사장과 계엄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만든다.
28장(Macro)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쁜 통을 해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28장은 검찰청 78년 만의 해체, 수사·기소 분리라는 구조적 개혁을 다뤘다. 그것이 Macro다. 하지만 새로운 통이 만들어져도, 그 통을 채우는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으면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중수청 수사관들이 또다시 상관의 지시만 따르는 BN 유형이라면, 간판이 바뀌어도 나쁜 통의 작동 방식은 그대로다. 29장(사유의 교육)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의 사유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30장은 그 연속이다. 관료들—이 사회를 실제로 운영하는 사람들—이 사유해야 한다. 중수청이든 공소청이든 행정부든 군대든, 그 안의 사람들이 "이것이 공익에 맞는가"를 묻지 않으면, 어떤 제도 개혁도 미완성이다. 공직 사회 안에서 그 질문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Micro 개혁의 관료제 버전이다.
국가공무원법 제57조가 사라지는 날. 76년간 "복종하라"고 명령했던 그 한 줄이 지워지는 날. 그것이 한국 관료제가 사유를 시작하는 날의 시작일 수 있다. 하지만 시작일 뿐이다. 법 한 줄이 사라진다고 사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이문옥 감사관의 6년, 이지문 중위의 4년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 다음 세대의 이문옥과 이지문이 영웅이 아니라 정상적인 공무원으로 인정받는 날이 오는 것. 그것이 Micro 개혁의 관료제 버전이다.
한국의 공무원들에게 필요한 것도 짐바르도의 실험에서 유일하게 거부한 학생이 했던 것이다. 자신이 공무원이라는 역할 이전에, 자신이 시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 관료의 언어 이전에, 인간의 언어를 먼저 쓰는 것. 복종하는 부품 이전에, 판단하는 주체라는 것을.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이 피해자를 "허들"이라고 불렀을 때, 그에게 없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업무 처리의 역할 이전에, 피해자를 인간으로 보는 시선. 그 시선이 사유다. 그 사유가 없으면, 강제동원 피해자는 "허들"이 되고, 계엄 명령은 "직무 수행"이 된다. 반대로, 그 사유가 있으면—이문옥처럼, 윤석양처럼, 이지문처럼—나쁜 통 속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그것이 BT 유형이 주는 가르침이다. 제도가 완벽하지 않아도, 사유하는 사람은 다른 길을 낸다. 그리고 그 다른 길이 결국 통을 조금씩 바꾼다.
1. 국가공무원법 제57조 (복종의 의무), 1949년 제정, 2025년 개정
2. 정책브리핑, 「공무원 '복종' 의무, 76년 만에 사라진다」, 2025.11.25.; 시정일보, 「국가공무원 '복종의 의무' 77년 만에 역사 속으로」, 2025.11.26.
3. 위키백과, 「내부고발」 항목; 이문옥 감사관, 윤석양 이병, 이지문 중위 사례.
4. 위키백과, 「내부고발」 항목; 공익신고자보호법 제정일 2011.3.29.
5. 김·장 법률사무소, 「공익신고자보호법 일부 개정 안내」, 2024.; 국민권익위원회 공익신고 통계.
6. 김·장 법률사무소, 앞의 자료, 2024.1.9.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7. 나무위키, 「내부고발」 항목; JTBC 뉴스룸 보도 인용.
8. 행정안전부, 공익신고제도 안내; 공익신고자보호법 제8조.
9. 주OECD 대한민국 대표부, 「효과적인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한 지원」, OECD 보고서 분석.
10. 대법원 1996.2.15. 선고 95다38677 전원합의체 판결.
11. 필립 짐바르도, 『루시퍼 이펙트』, 웅진지식하우스, 2007.
12. 레이로그(raylogue.com), 「강제동원 피해자를 '허들'이라 부른 관료: 심규선의 언어와 악의 평범성」, 2026.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