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AJIM 모델의 해법 – 사유의 복원과 통의 개혁
2023년 12월, OECD는 PISA 2022 결과를 발표했다. 만 15세 한국 학생들은 수학 OECD 회원국 1~2위, 읽기 1~7위, 과학 2~5위를 기록했다.¹ 81개국 전체 참여국 기준으로도 수학 3~7위, 읽기 2~12위, 과학 2~9위였다. OECD 국가들의 성취도가 코로나19 여파로 전 영역에서 하락하는 동안, 한국 학생들의 점수는 오히려 소폭 상승했다. 세계가 다시 한번 놀랐다. 교육부 장관이 PISA 국제발표회에 처음으로 초청됐다.
그런데 1년 뒤인 2024년 12월, 또 다른 OECD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엔 만 16세부터 65세까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였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한국 성인의 문해력은 500점 만점에 249점으로 OECD 평균(260점)보다 11점 낮았다. 수리력은 253점으로 OECD 평균(263점), 적응적 문제해결 능력은 238점으로 OECD 평균(251점)에 각각 못 미쳤다. 세 영역 모두 OECD 평균 이하였다.² 10년 전 같은 조사에서 한국 성인의 문해력은 273점으로 OECD 평균과 같았다. 10년 사이 24점이 떨어진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모든 영역 1위를 기록한 나라는 핀란드였다. 문해력 296점, 수리력 294점, 문제해결력 276점이었다.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15세에 세계 최상위권, 성인이 되면 OECD 평균 이하. 이 역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점수가 측정하지 못하는 것
수치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패턴이 보인다. PIAAC에서 한국의 연령별 문해력은 24세를 정점으로 급격히 하락한다. 25~34세에서 268점으로 OECD 평균을 겨우 웃돌다가, 35~44세에서 OECD 평균 이하로 떨어지고, 55~65세에서는 217점으로 추락한다. OECD 보고서는 56~65세와 25~34세의 점수 차이가 55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며—OECD 평균 세대 간 차이는 30점—이를 세대 간 "교육과 훈련의 질과 양의 차이"로 설명한다.³
고령화와 세대 간 교육격차가 전체 평균을 끌어내린 측면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령화만으로 이 역설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왜 한국에서는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지적 역량이 쇠퇴하는가. 15세에 배운 것이 삶 속에서 자라지 않고 오히려 빠르게 녹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한국의 청소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에 쓰면서도, 그 공부가 성인의 사유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하나의 가설이 있다. 한국의 교육이 지식을 삶과 연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기억력을 훈련시켜 왔다는 것이다. 졸업 이후 더 이상 시험이 없으면, 훈련된 기억력은 쓸 곳을 잃는다. 사유의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를 읽고 판단하는 능력은 사회에 나온 후 빠르게 녹는다. 이것은 단순히 교육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AJIM 모델이 경고하는 무사유의 구조적 생산 문제다. 나쁜 통(bad barrel)은 직장과 조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라는 통이 먼저 인간을 만든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만들어진 인간들이 다시 나쁜 조직의 통을 채운다.
이 가설을 완전히 증명하기는 어렵다. 변수가 너무 많다. 그러나 PISA와 PIAAC의 역설은 적어도 하나를 가르쳐준다. 성취가 교육의 성공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성취인가가 중요하다. 무엇을 잘 하게 됐는가가 중요하다. 15세에 세계 최고의 성취를 보이는 나라가, 성인이 되면 OECD 평균에도 못 미친다는 것은—그 원인이 무엇이든—교육이 삶을 위한 역량을 충분히 키우지 못했다는 신호다.
정답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
한국 교육의 입시 중심 구조는 오래된 비판의 대상이었다. 문제풀이 기계를 양성한다는 지적, 창의성을 억압한다는 진단, 질문 없는 교실이라는 묘사. 이 비판들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AJIM 모델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시 읽으면, 그 심각성이 다른 차원으로 드러난다.
암기 중심 교육이 생산하는 것은 단순히 창의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정답에 복종하도록 훈련된 사람이다. 수능 체제 아래서 수십 년간 반복된 훈련의 핵심은 이것이다.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최선의 정답을 고르라.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오개념을 지우고 정해진 개념을 채워 넣어라. 교사가 설명하면 받아 적어라. 이해보다 속도가 중요하고, 판단보다 선택이 중요하다.
이 구조의 기원은 대학입학 학력고사(1982학년도~1993학년도)에서 찾을 수 있다. 1981년부터 1992년까지 총 11년간 시행된 이 시험은 사실상 자격고사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암기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주입식 교육이 차용됐다. 원리 이해 없이 수치만 외워서 푸는 방식이 확산됐다. 숫자를 조금 바꾸면 풀지 못하지만, 주어진 패턴이 그대로 나오면 풀 수 있다. 이 방식은 단기 성적을 올리는 데 효율적이었다.⁴ 1993년 수능이 처음 실시되고 1994학년도부터 정식 시행되었지만, 교실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수십 년간 이 구조 속에서 훈련받은 교사들이 여전히 교실에 있다. 방법이 달라져도 정답을 향한 복종의 구조는 유지된다.
이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어진 선택지 밖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약해진다. 아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상황—불확실하고, 모순되고, 복잡한 현실—에서 스스로 판단해야 할 때, 그 근육이 작동하지 않는다. 아렌트가 말한 "생각의 무능력(inability to think)"이 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결이다. 검찰 조직에서 절차만 따르는 검사가 양산되는 것, 행정부에서 지시만 기다리는 공무원이 늘어나는 것,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는 말이 변명이 되는 것—이 모든 현상의 뿌리에 이 교육 구조가 있다. BN 유형의 인간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정답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커서는 상관의 지시에 복종하는 사람이 된다. 통(barrel)은 직장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이미 시작된다.
물론 이 주장에는 반론이 있다. PISA 최상위권 성과가 교육의 성취를 증명한다는 주장이다. 그 반론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PISA의 성취가 허구는 아니다. 문제는 그 성취가 무엇을 측정하는가에 있다. PISA는 15세 시점에서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특정 문제를 푸는 능력을 측정한다. 그것은 훈련으로 향상될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이다. 하지만 삶의 복잡한 상황에서 판단하고, 타인과 숙의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능력—즉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량—은 다른 종류의 능력이다. PIAAC가 측정하려는 것이 후자에 더 가깝다. 한국은 전자에서 세계 최고지만, 후자에서 OECD 평균 이하다.
아렌트가 1954년에 본 것
한나 아렌트는 1954년 「교육의 위기(The Crisis in Education)」를 발표했다.⁵ 이 글은 1961년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에 수록됐다. 그녀가 분석한 것은 당시 미국 교육의 위기였지만, 그 통찰은 70년이 지난 한국에 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아렌트는 교육의 본질이 탄생성(natality)에 있다고 보았다. 새로 태어난 인간은 세상에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올 수 있는 존재다. 교육의 역할은 그 새로움을 보존하고, 동시에 기존 세계와 연결해주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세계를 소개할 책임이 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다.⁶
그런데 아렌트가 목격한 교육의 위기는 이 연결이 끊긴 것이었다. 교육이 정치적·사회적 목적에 종속되어, 아이들을 새로운 세계의 주인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 체제에 적응시키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진단이었다. 배움은 시험 성적이 되고, 지식은 도구가 되고, 아이들은 성과 지표로 환산된다. 아렌트는 이것을 "진지한 배움의 부재"라고 불렀다.
한국의 교육 연구자들은 이를 "디커플링 현상"으로 표현한다.⁷ 학교 교육과 학원 교육의 분리, 배움과 (시험) 공부의 분리다. 학원은 가속사회의 논리에 맞게 진화했다. 정답을 빠르게 찾는 기술, 유형을 암기하는 요령, 실수를 최소화하는 전략. "대입을 위한 요령 위주의 입시 교육, 입시를 위한 '문제풀이 기계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라는 진단이 나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교는 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시험의 전선(戰線)이 됐다. 아렌트가 경고한 방향으로 한국 교육은 수십 년간 달려왔다.
그러나 아렌트의 더 깊은 통찰은 교육과 도덕의 연결에 있다. 그녀는 사유가 도덕적 행위의 전제라고 보았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없다. 자신의 행위가 낳는 결과를 상상하지 못한다. 명령의 사슬 속에서 한 번도 "이것이 옳은가"를 자문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렌트가 아이히만에서 발견한 "생각의 무능력"이었다. 사유의 교육은 단순히 좋은 성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한, 악의 평범성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탄생성(natality)의 교육적 함의는 더 나아간다. 모든 아이는 세계에 새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으로 태어난다. 그 가능성이 교육을 통해 억압되면, 인간은 기존 질서에 통합되는 부품이 된다. 부품은 명령을 수행한다.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렌트가 경계한 "세계의 무책임성"이다. 교육이 탄생의 새로움을 지우고, 체제 적응의 완성을 목표로 할 때—그 체제가 아무리 효율적이라도—그 교육은 인간을 BN 유형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사유는 방법론이 아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오해를 정리해야 한다. 사유의 교육은 비판적 사고 교육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비판적 사고 기술을 교과에 삽입하고, 논술 수업을 확대하고, 토론 프로그램을 늘린다고 해서 사유하는 시민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thinking)는 기술(skill)이 아니라 삶의 방식(way of life)이다. 사유는 "나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멈추고 자문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행위 이전에 "이 결과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으로 단기간에 습득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삶 전체에서 함께 작동하는 도덕적 성향이다. 비판적 사고 연구에서도 이 점은 인정된다. 연구자들은 비판적 사고의 수행을 위해 "사고기술뿐만 아니라 사고성향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 성향의 계발은 "기술과 지식처럼 단순히 전달하는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태세를 갖추게 하는 문제"다.⁸ 사유의 교육이란 마음의 태세를 만드는 것이다.
연구자 천명주는 아렌트의 사유를 이렇게 정리한다. 아렌트의 사유는 "인간이 사악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관념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도덕적 능력"이다.⁹ 사유하는 시민은 정치공동체 속에서 악행을 행하지 않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도덕적 존재다. AJIM 모델의 GT 유형 시민이 바로 이 존재다. 그렇다면 사유의 교육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세 가지 능력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멈추고 묻는 능력
한국 교육 현장에서 가장 빠르게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많은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대답한다. 학생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면 수업이 지연되고, 진도를 맞추지 못한다. 빠른 진도가 경쟁력이다. 모르는 것이 있어도 학원에서 해결하면 된다. 학교는 질문하는 곳이 아니라 받아 적는 곳이 됐다.
그런데 질문은 사유의 시작이다. "이게 왜 그렇지?"라고 멈추는 순간, 사유가 시작된다. 아이히만은 "왜?"라고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지시가 내려오면 수행했다. 명령의 사슬 속에서 한 번도 "이것이 옳은가"를 자문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이를 사유의 결여, 즉 무사유(Non-thinking)라고 불렀다. 이 무사유는 인간이 특별히 악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멈추는 습관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다.
질문하는 능력은 기술이 아니다. 멈추는 습관이다.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정말 그런가?"라고 묻는 성향이다. 이 성향은 어릴 때부터 길러지지 않으면, 커서 조직에 들어갔을 때 상관의 지시 앞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 조직은 이 성향을 체계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승진하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 사람이고, 배제되는 사람은 "왜?"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질문이 억압되는 것과, 검찰 조직에서 이의가 억압되는 것은 같은 구조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무사유의 전염은 교실에서 시작된다.
질문하는 교실은 어떤 모습인가. 교사가 모든 답을 아는 척하지 않는 교실이다. 학생의 "왜?"를 막지 않는 교실이다. 오개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실이다. 정답보다 사고 과정이 더 평가되는 교실이다. 이런 교실이 무사유를 예방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민주주의다.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질문하는 습관은 교실에서만 길러지지 않는다. 가정, 지역 공동체, 미디어 환경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부모가 아이의 "왜?"에 "그냥 외워"로 대응하는 가정에서, 질문하는 습관은 자라지 않는다. 언론이 팩트 없이 감정만 증폭하는 환경에서, 정보를 비판적으로 읽는 습관은 약해진다. 미디어 리터러시 연구들은 학교에서의 미디어 교육 경험이 비판적 사고 성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¹² 질문하는 능력은 교실 안에서 시작되지만, 교실 밖에서 완성된다.
두 번째: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능력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확장된 사유(enlarged mentality)"를 강조했다. 자신의 관점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이다. 이것이 정치적 판단력의 핵심이다.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같은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상상할 수 있어야, 공동의 세계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
한국 교육은 이 능력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켜 왔다. 내신과 수능의 상대평가 구조에서 타인의 성공은 나의 실패를 의미한다. 이 구조 속에서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시간 낭비가 된다. 경쟁은 타인을 협력의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경쟁자로 만든다.
짐바르도의 탈인간화(Dehumanization)는 타인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에서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죄수를 번호로 인식했다. 개성을 지우고, 제복을 입히고, 번호로 부르면 탈인간화는 완성된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 "종북", "적폐"라는 낙인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낙인이 찍힌 사람은 더 이상 구체적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상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탈인간화의 능력은 어린 시절부터 타인을 경쟁 상대로만 보도록 훈련받은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타인의 입장에서 보는 교육은 이 탈인간화에 저항하는 훈련이다. 역사 교육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경험을 탐색하는 것, 문학 교육에서 다른 삶의 방식에 공감하는 것, 사회 교육에서 나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 이것은 단순히 공감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집단적 무사유가 낳는 탈인간화에 대항하는 시민적 능력의 문제다. 5·18 피해자들을 "폭도"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구체적 인간으로 상상하는 능력이 봉쇄됐기 때문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정치적 도구로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상상하는 능력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타인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 교육이, 그 차단을 막는다.
세 번째: 자신의 판단에 책임지는 능력
사유의 교육에서 가장 간과되기 쉬운 것이 책임이다. 판단하는 것과 그 판단에 책임지는 것은 다른 일이다. 한국 교육은 정답을 고르는 훈련을 시키지만, 틀렸을 때 그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경험은 제공하지 않는다. 오개념은 교정되어야 할 오류지, 성장의 과정이 아니다. 점수가 낮으면 더 많이 외우면 그만이다. 왜 틀렸는지를 자신이 탐구하는 공간이 없다.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하는 시민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존재다. 책임의 경험이 없으면 사유도 없다. 자신의 판단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목격하고, 그 결과와 직면하고, 거기서 다시 생각하는 과정—이것이 사유의 실제 작동 방식이다. 결과를 피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사유는 자라지 않는다.
한국 관료제의 가장 강력한 무사유 기제 중 하나가 책임의 분산과 회피다. "지시대로 했습니다", "상급자의 결정입니다", "절차를 따랐습니다"라는 언어는 모두 판단의 주체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아이히만이 예루살렘 재판정에서 반복한 말이 이것이었다. 이 언어의 습관은 학교에서 시작된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교과서에 그렇게 나왔습니다. 틀린 것이 없습니다." 책임을 지는 경험이 없으면, 상관이 시키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 직업윤리가 된다. 그 직업윤리가 쌓이면 관료적 무사유가 된다. 그 관료적 무사유가 집단화되면 아이히만이 된다.
책임지는 교육은 실패를 허용하는 교육이다. 자신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이 있는 교육이다. 점수가 아니라 판단 과정이 평가되는 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만든다.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나쁜 통(bad barrel) 속에서도 "이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무사유의 전염은 멈춘다.
교육 개혁의 두 축: 구조와 문화
사유의 교육을 위한 구체적 방향은 구조와 문화, 두 축으로 나눌 수 있다.
구조적으로는 평가 방식의 전환이 핵심이다. 선택형 문항 중심의 수능 체제가 판단보다 선택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오래된 진단이다. 서술형·논술형·프로젝트 기반 평가는 정답이 하나인 문제 대신 복수의 관점이 공존하는 문제를 다루도록 강제한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éat)가 철학적 논술을 필수 과목으로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다. 민주 시민이 사유해야 한다는 공화주의적 교육관의 표현이다. 프랑스는 PIAAC에서 한국보다 문해력 순위가 낮다. 그 역설이 시사하는 것이 있다. 바칼로레아가 사유 능력을 확실하게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왜 존재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자유는 어디서 시작하는가"라는 질문을 매년 수백만 명의 10대에게 국가가 공식적으로 던진다는 것의 의미는 다르다. 그 질문이 습관이 되면, 멈추는 능력이 된다. 2028 대학입시 개편 논의에서 "외우는 공부는 끝났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방향성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변화의 조짐이다. 문제는 방향성이 제도화되더라도, 교실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같은 답을 다른 형식으로 제출하는 훈련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문화적 변화는 더 어렵고 더 중요하다. 교사의 역할이 정답을 전달하는 사람에서 탐구를 함께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렌트는 교사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¹⁰ 교사는 아이들에게 세계를 소개할 의무가 있다. 단순히 교과서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지금 이런 모양이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사 양성 과정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과제다.
또한 아렌트는 "함께 생각하기(thinking together)"를 강조했다. 판단은 공론의 공간에서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정교화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한 공적 영역(public sphere)의 기능이다. 학교는 이 공적 공간의 훈련장이 될 수 있다. 토론, 논쟁, 이견의 허용, 다수결이 아닌 숙의—이런 교실 문화가 민주주의의 DNA를 만든다. 비판적 사고 교육 연구들은 문제 기반 학습(PBL)이 일반 강의식 수업보다 사유 능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¹¹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라는 목적론의 문제다.
한국 안에서 찾는 사유의 계보
교육 개혁의 논의에서 핀란드나 프랑스가 자주 참조된다. 그 사례들이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한국 역사 속에 이미 사유의 교육이 실천된 계보가 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씨알사상을 통해 생각하는 백성, 질문하는 민중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민중이 사유하지 않으면 지도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의 교육관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각성의 촉발이었다.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묻게 하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체제 속에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가 살아남는 것이 가능하다는 BT 유형의 실증이다. 노무현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민주주의의 기반으로 보았다. 시민이 판단하지 않으면, 정치는 다시 소수의 손에 쥐어진다는 인식이었다. 김대중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표현으로,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을 판단하는 능력이 민주 정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이 바로 Micro 차원의 해법—사유하는 시민의 탄생—이었다. 사유의 교육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다. 억압된 채 살아남은 그 목소리를 다시 교실로 데려오는 것이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 장준하의 저항이 역사 교육에서 단순한 민족운동이 아니라 사유의 실천으로 가르쳐져야 한다. 노무현의 "깨어있는 시민"이 슬로건이 아니라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목표가 교실 안으로 들어올 때, 한국 교육의 전통은 핀란드나 프랑스에 빚지지 않고도 자신만의 사유 교육의 계보를 가질 수 있다.
AJIM 모델이 요청하는 Micro 해법
AJIM 모델은 악을 예방하는 두 개의 축을 제시한다. Macro—나쁜 통을 개혁하는 구조적 변화—와 Micro—무사유를 사유로 전환하는 교육적 변화다. 짐바르도는 Macro를 담당하고, 아렌트는 Micro를 담당한다.
Macro 개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한국 현대사가 보여준다. 1948년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 헌법적 구조 속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유신이 선포됐고, 계엄이 반복됐다.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은 살아남았고, 검찰은 정치화됐고, 법원은 권력에 봉사했다. 구조를 바꿔도 그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으면,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민주주의는 사유하는 시민을 전제로 한다. 투표하는 시민이 아니라 판단하는 시민을 필요로 한다. 판단하는 시민은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그 만드는 과정이 교육이다. 사유의 교육이 실패하면, 민주주의의 형식은 작동하지만 내용은 텅 빈다. 선거는 있지만 선택이 없다. 헌법은 있지만 저항이 없다. 법치는 있지만 정의가 없다. 그리고 그 텅 빈 민주주의 안에서, 다시 BN 유형의 권력이 자란다. 1장에서 살펴본 아이히만이 나치 독일이라는 나쁜 통의 산물이었다면, 한국의 BN 유형 관료들은 학교라는 통에서 만들어진 무사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통은 중첩된다. 학교 → 대학 → 조직 → 사회 전체로. 무사유의 전염은 이 중첩된 통들을 따라 흐른다.
PISA에서 세계 최상위권인 15세 한국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OECD 평균 이하의 역량을 보인다는 사실은, 한국 교육이 삶을 위한 사유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다. 시험은 잘 치르도록 훈련받았지만, 판단하도록 훈련받지는 않았다. 정답을 고르는 법은 배웠지만,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질문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아이히만을 비판하면서, 아이히만을 만드는 교육을 지속해왔는지도 모른다. 이 반성이 불편하다면—그것이 사유의 시작이다.
이것이 AJIM 모델이 요청하는 교육의 전환이다. 암기에서 사유로. 선택에서 판단으로. 복종에서 책임으로.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질문자로. 이 전환이 일어날 때, 학교는 BN 유형 시민의 공장이 아니라 GT 유형 시민의 훈련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훈련장에서 나온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살아있게 한다. 좋은 통(good barrel)은 제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통 안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이 채울 때, 비로소 좋은 통이 된다.
악은 학교에서 예방될 수 있다. 아이히만이 한 번이라도 "이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그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쉰들러는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했기 때문에 BT 유형이 됐다. 그 사유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오랫동안 질문하는 습관을 길러온 사람만이, 압도적인 상황의 논리 앞에서도 멈출 수 있다.
멈추는 습관. 그것이 교육이 줄 수 있는 가장 작은 투자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오래가는 예방이다.
2. OECD,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2024」, 2024.12.; 전자신문, 「성인 문해력·수리력·문제해결 능력 OECD 평균보다 낮아」, 2025.4.22.; 투데이신문, 「한국 성인 문해력 OECD 평균 미달」, 2024.12.11.
3. OECD PIAAC 2024; 투데이신문, 앞의 기사, 2024.12.11.
4. 위키백과, 「학력고사」 항목; 머니S, 「1981년부터 1992년까지 총 11년 동안 시행됐던 학력고사의 시대가 끝나고」, 2024.8.19.; 나무위키, 「대학입학 학력고사」 항목 참조.
5.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The Crisis in Education)」, 1954. 수록: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1961.
6. 조나영, 「한나 아렌트의 "교육의 위기"를 통해서 본 '탄생성' 교육의 의미」, 『인문과학연구논총』 34(1), 2013, pp.331-364.
7. 박은주,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하다』, 세종도서 학술부문, 2021; 에듀프레스, 「[학교장의 서재]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하다'와 학교경영」, 2025.3.
8. 윤초희, 「국내외 비판적 사고교육 효과연구 고찰: 쟁점과 향후 연구과제」, 서울대학교, pp.1-30.
9. 천명주, 「한나 아렌트의 '사유하는 시민'과 도덕교육적 방법」, 『윤리교육연구』 28, 2012, pp.91-110.
10.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 박은주, 앞의 책, 2021.
11. 윤초희, 앞의 논문, 참조; Burris & Garton(2007), PBL 효과 연구.
12. 안정임 외, 「미디어 교육 경험과 미디어 리터러시가 비판적 사고 성향에 미치는 영향」,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1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