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프롤로그

by 한시을


프롤로그: 유하사의 종소리


안동 유하사의 종소리가 산사의 아침을 열었다. 2023년 10월 3일, 어머니의 49재가 열리는 날이었다. 절 입구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을빛이 짙게 물든 산자락, 그 품에 안긴 고즈넉한 사찰. 어머니의 고향이자 오랫동안 다니셨던 이곳, 어머니는 유하사를 참 좋아하셨다.


한 발 한 발 무거운 발걸음으로 법당을 향해 걸었다. 손에는 7주 동안 써 내려간 행장록이 들려 있었다. 서툰 손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책 한 권. 어머니의 생애를 기록한다는 것, 그것은 내게 어머니를 좀 더 오랫동안 곁에 붙잡아두는 방법이었다. 장례만으로는 너무 짧았다. 이별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이른 헤어짐이었다.


법당 앞 작은 연못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나는 어머니 앞에서는 철없는 아들이었다. 행장록을 시작하던 날 밤, 나는 이렇게 적었다.


"불초소생 장남은 어머니의 행장을 기록하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다. 불초소생(不肖小生). 어머니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못난 자식. 그 무거운 글자들을 써 내려가며 얼마나 많은 밤을 울었던가.


유하사 법당 안은 고요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부처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스님의 눈짓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작은 목탁 소리가 울리고, 49재의 의식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위한 마지막 의식.


눈을 감으니 지난 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2023년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그날도 이렇게 맑은 날씨였다.


"어머니, 오늘은 연등도 달고 절에 가요."


어머니는 환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늘 그러셨듯이 깔끔하게 차려입고 준비를 마치셨다. 평생 불심(佛心)이 깊으셨던 어머니와 함께 유하사로 향했다. 그날 유하사에는 안동에 계시는 큰 외삼촌 내외분도 함께했다. 누가 봐도 건강하고 정정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 누구도 몇 달 후의 일을 예상할 수 없었다.


"절 음식 참 맛있지? 이 된장 비빔밥 정말 맛있구나."


어머니는 유하사에서 대접한 된장 비빔밥을 맛있게 드셨다. 평소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드시던 어머니였지만, 그날따라 특히 더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어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 부처님 오신 날이 될 줄은.


"여기 계단이 많지? 내가 젊었을 때는 뛰어올랐는데..."


어머니와 함께 유하사의 계단을 오르며 이야기를 나눴다. 건강하셨던 어머니는 평소처럼 정갈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셨다. 그날, 연등 아래서 어머니는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젊은 시절 처음 이 절에 왔던 날, 아버지와 함께 가족 건강을 빌던 때, 홀로 식당을 운영하며 힘들 때마다 이곳에서 위안을 얻었던 순간들. 평소 말씀이 적으셨던 어머니가 그날은 유독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너희들 키울 때, 제일 힘들었던 건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의 끝은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문득 말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보셨다. 내가 물었어야 했다. "어머니, 제일 힘들었던 건 뭐였어요?" 하고.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일상의 소소한 대화로 돌아가 버렸다. 어머니의 말씀 끝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까. 지금도 그 궁금증이 가슴을 친다.


그날의 기억이 더욱 소중한 것은, 그로부터 석 달도 안 되어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비극이었다. 평생 건강하게 사셨던 어머니가 의약품 부작용 피해로 7월 5일 갑자기 입원하셨다. 대구 지저동에서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계시던 어머니는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셨고, 범어동에 사는 나는 매일 병원을 오가며 어머니의 회복을 기도했다. 하지만 8월 15일, 어머니는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목탁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법당을 채웠다. 나는 눈을 떴다. 스님의 독경이 이어졌다.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행장록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8월 15일로부터 이틀 후였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날 밤, 막내동생의 집 옆방에 홀로 앉아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인생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장례만으로는 너무 짧았다. 이별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이른 헤어짐이었다. 어머니를 그냥 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이 행장을 통해서라도 좀 더 오랜 시간 어머니를 곁에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전에 한 번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어머니의 삶을 글로 남기는 일뿐이었다. 어머니의 헌신과 노고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어, 늦었지만 이 방법으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첫 장을 펼쳤을 때 무엇부터 써야 할지 막막했다. 어머니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정리할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특별한 순간들을 모아볼까. 고민 끝에 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시대별로 구분해 보기로 했다. 20대, 30대, 40대... 그렇게 어머니의 시간을 더듬어갔다.


쓰고 또 쓰는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행장록을 쓰는 내 손이 때로는 어머니의 손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안동에서 홀로 식당을 운영하며 보내셨던 그 세월,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리고 때로는 행장록에 적힌 글자들 사이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큰 애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어머니는 항상 그러셨다.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셨다. 셋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우리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셨다. 묵묵히 일어나 식당으로 향하셨다. 손님들에게 늘 그대로의 정갈한 음식을 내놓으셨다. 그 강인함이 때로는 냉정함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방에서 새어 나오던 흐느낌을 모른 척했던 우리였다.


"이제 유족 대표께서 고인을 위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스님의 말씀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행장록을 펼쳤다. 49일 동안 써 내려간 이 글들 중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무엇이 어머니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행장록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내가 어젯밤에 적은 글이 있었다.


"어머니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사랑과 가르침은 우리 안에서 계속됩니다. 비록 생전에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이 행장을 통해 전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목이 메어졌다. 그러나 어머니라면 이런 때 감정을 추스르고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오늘 저는 어머니의 행장을 통해 그분의 생애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어머니가 걸어오신 그 시간들,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법당 창문으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 속에 어머니가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유하사에서의 49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안동의 풍경이 흘러갔다. 이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자, 내가 자란 곳이기도 했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 위에서, 나는 다시 행장록의 첫 장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