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20대 1화 젊은 부부의 시작

by 한시을

1962년 봄, 스무 살 어머니


라디오에서 "잘 있거라 부산항"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962년 봄, 어머니가 스무 살이던 그해였다. 안동 장터에서는 어른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정희가 경제개발을 하겠다고 하던데, 과연 될까?" "공장도 짓고 도로도 넓힌다더라." "젊은 사람들이 서울로 다 떠나니 걱정이야."


어머니에게는 아직 먼 세상 이야기였다. 스무 살 처녀에게 더 중요한 건 곧 다가올 결혼이었으니까.


그때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설레면서도 두려웠을 것 같다.


사실 그 시절엔 나라 전체가 뭔가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집권했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것도 시작됐다. 하지만 안동은 여전히 조용했다.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의 고장답게, 안동 사람들은 급작스러운 변화보다는 신중한 관망을 선호했다.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나오실 때도 여전히 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계셨으니까.


라디오: "조국 근대화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지만 안동 시장에서는 여전히 "그 무꾸 어디 거이꺼?", "고추 좀 보시더" 하는 소리가 더 익숙했다.


그때 여자로 산다는 것


1960년대 안동에서 여자의 인생은 정해져 있었다. 시집가서 시어머니 모시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것. 법적으로는 남편 호적에 들어가는 '가족'이었지만, 실제로는 집안의 중심축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빨래터에서 하는 이야기는 늘 이랬다. "며느리는 참는 게 덕이지." "아들 낳으면 집안이 든든해." "친정은 이제 남의 집이야."


이런 말들이 어머니 세대 여성들을 둘러싼 공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소리도 들렸다: "요즘 세상이 참 빨리 변한다." "여자도 글을 배워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더라."


변화의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아주 작은 파문 정도였다.


그런 시대에 어머니는 열아홉에 아버지를 만나 스무 살에 결혼하셨다. 어머니가 남겨두신 사진첩을 보면 두 분의 약혼 사진이 있다. 아버지는 뒤로 넘긴 짧은 머리에 양복을 차려입었고, 어머니는 전통 한복에 머리를 길게 땋고 계셨다.


흑백사진 속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 어려 보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바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 거였다. 어머니의 20대는 처음부터 '엄마'로서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스무 살에 신부가 된 어머니,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웃픈 가족 이야기


우리 가족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외할아버지는 동네 씨름대회에서 자주 우승해서 송아지를 타오는 장사였고, 외할머니는 그 동네에서 미인으로 소문난 분이셨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이미 돌아가셔서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외할머니를 보고 결혼을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버지가 가끔 농담으로 "너희 어머니는 예쁜 외할머니를 닮지 않았다"라고 말씀하곤 하셨다는 점이다.


어머니와 직접 만나보기도 전에 장모님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아버지. 이 에피소드는 가족 모임 때마다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농담을 어떻게 들으셨을까. 서운하셨을까, 아니면 그냥 웃어넘기셨을까.


엄마가 되다


1963년,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스물한 살이었다. 결혼 첫해에 바로 첫아이를 낳은 거였다. 기쁨과 두려움, 아들을 낳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찾아온 무거운 책임감.


"아들 낳았네! 잘했어!"


시댁 어른들은 좋아하셨지만, 정작 어머니 마음은 어땠을까. 갑자기 '엄마'가 되어버린 스물한 살 여자의 심정이.


어머니는 나를 안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 작은 생명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그런 걱정들로 가득했을 것 같다.


동네 선배 엄마들이 조언해 주셨다. "첫아이는 누구나 어려워. 그래도 금방 익숙해져." "아들이니까 잘 키워야 해." "젖 많이 먹여야 튼튼하게 커."


어머니는 그런 조언들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면서, 천천히 엄마가 되어가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무 살 어린 신부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계셨다.


전통 혼례의 마지막 모습


내가 5, 6살 되었을 때쯤, 5촌 고모가 결혼할 때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골 마당에 하얀 천막을 치고, 고모부가 멀리서 와서 전통 혼례를 올렸다. 신랑은 사모관대에, 신부는 족두리에 연지곤지를 찍고 한복을 입고 절하는 모습, 온 가족이 다 모여서 찍은 사진 속에 어머니도 스물다섯여섯 살의 젊은 며느리로 서 계셨다.


그때만 해도 축의금은 돈보다 쌀이나 술, 음식이 더 많았다. 동네 사람들이 쌀가마니를 들고 와서 마당 한쪽에 쌓아놓고, 아낙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만드는 북적거리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전통 혼례의 마지막 세대를 지켜보면서, 세상이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셨을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결혼한다더라." "하얀 드레스 입고 하는 게 멋있어 보이던데."


하지만 안동에서는 아직 전통 방식이 더 자연스러웠다.


큰 역사와 작은 역사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화를 추진했지만, 어머니는 '엄마 되기 10년 계획'으로 우리 가족이라는 작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계셨다.


포항에서는 제철소를 짓고 있었고, 어머니는 안방에서 생명을 키우고 계셨다. 나라가 강을 막아 댐을 만들 계획을 세우는 동안, 어머니는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보금자리를 만들고 계셨다.


둘 다 미래를 위한 일이었지만, 어머니가 하신 일이 더 직접적이고 절실했다.


어머니의 20대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열아홉에 만난 사랑이 스무 살 결혼으로, 스물한 살 첫아들 출산으로 이어지면서, 어머니는 점점 더 깊은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고 계셨다.


그때 안동의 하늘은 정말 높고 푸르렀다. 그 하늘 아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20대 초반을 온전히 바쳐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고 계셨다.


어머니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겠지만, 어머니가 키운 아이들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거였다.


이게 어머니 20대의 시작이었다. 격동하는 시대 한편에서 일어난,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의 첫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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