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20 대 "격동의 10 년, 안동의 하늘 아래 "

by 한시을

20대 2화: 가족의 터전을 만들어가다


단칸방에서 시작된 희망과 번창하는 사업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1964년 봄, 첫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에게 인생의 첫 번째 큰 시련이 찾아왔다. 내가 1-2살 때였던 것 같은데, 어린 기억이라 명확하지는 않지만 외가에서 장례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중 한 분의 장례였을 것이다.


나는 모르는 분에게 안긴 채 몹시 울고 있었고, 어머니가 부엌을 들락거리며 나를 달래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조문객들이 드나드는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우는 아이를 돌봐야 했다.


스물한 살의 어머니에게 그 순간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부모님을 잃은 슬픔과 혼란 속에서도 끊임없이 보채는 어린 아들을 보며,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과 동시에 이 작은 생명만큼은 온전히 품어야 한다는 본능적 사랑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 무렵 우리는 성당 근처에 살았나 보다. 4-5세 때 성당의 종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려서 나는 항상 창가에서 성당을 바라보곤 했다.


국수만 먹던 시절의 약속


"엄마, 오늘도 국수야?"


그때는 맨날 국수만 먹어서 밥을 먹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조금만 참으면 곧 밥을 먹을 수 있을거야"라고 다독여주셨다. 그 말씀 속에는 어려운 현실을 견뎌내려는 어머니의 의지와 아이에 대한 사랑이 함께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가구점에서는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소리와 못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톱밥과 아교 냄새가 풀풀 나는 작은 공간에서,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가구를 만드셨다.


라디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현실은 아직 그 '개발'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동네 아낙들이 나누는 이야기도 비슷했다:


"요즘 TV 있는 집이 늘어나더라."

"우리도 언제 전축 한 대 들여놓을까?"

"시방 살림이 이래 가지고는..."


그 시절 어머니에게 "조금만 참으면"이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하얀 밥을 배불리 먹여줄 수 있을 거라는...


노력의 결실이 찾아오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20대 중기로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이사를 했고, 둘째와 셋째가 태어났다. 사업이 번창해서 직원이 5-6명이나 되었다.


"사장님, 이번 달 주문이 지난달보다 두 배는 늘었습니다!"

"자개농 주문이 계속 들어오네요."


삼촌 두 분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어 어머니는 도시락이며 빨래며 뒷바라지까지 맡아야 했다. 스물여섯 살의 어머니에게는 세 아이 키우기도 벅찬데, 시동생들까지 돌봐야 하는 바쁜 나날이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직원들과 낙동강에 야유회를 가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그때 얼마나 뿌듯했을까. 국수만 먹던 시절을 지나 아버지의 밤낮 없는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직원들과 야유회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낙동강변의 여름날, 행복의 풍경


그 야유회 사진을 지금 봐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사진 상단 뒤편으로는 멀리 흐릿한 산이 보이고, 낙동대교가 산을 가로질러 시원하게 좌우로 길게 뻗어 있다. 사진의 45도 좌측 중하단에는 낙동강 모래사장이 원근감 있게 펼쳐져 있고, 45도 우측에는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다.


미루나무 여러 그루가 심어 놓은 듯 45도선을 따라 위로 솟아올라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 무렵 정부의 치산녹화 정책으로 전국 강변과 도로변에 속성수인 미루나무를 대대적으로 심던 시절이었다. 나라가 강변에 미루나무를 심어 푸른 국토를 만드는 동안, 어머니는 가정에 사랑을 심어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계셨다.


총 11명이 함께한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음식 차림을 하느라 사진에는 없지만, 아버지와 나, 둘째 외삼촌과 직원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자, 여기 앉으세요!"

"아이들은 앞쪽으로 나오고!"

"사진 찍을 때까지만 가만히 있어야 해!"


사람들은 위로 둥근 반원 형태로 자리를 잡았는데, 세 사람은 서 있고 나머지 여덟 명은 앉아 있다. 맨 우측에는 아버지가 맥주 글라스를 들고 마시는 모습이 보이고, 바로 옆 직원은 맥주병을 나팔처럼 들어 올리며 소리친다.


"사장님을 위하여! 한 잔 합시다!"

"올해도 장사 잘 되시길 바랍니다!"


좌측 두 번째 둘째 외삼촌 역시 맥주병을 나팔 삼아 흥겨워하며 웃고 있다.


"아 시원하다! 이런 게 진짜 쉬는 거지!"


나는 가운데 앉은 직원 부인의 앞다리에 포개 앉아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더위를 식히려 직원 가족들과 함께 온 그 여름날, 가족 사업이 번창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시동생들 뒷바라지까지... 어쩌면 하루가 모자랄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어머니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행복도 강변에 뿌리내린 미루나무처럼 깊고 단단하게 자라가고 있었다.


바깥세상의 달콤한 유혹


1970년경, 큰외삼촌이 베트남 파병에서 돌아왔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큰 더블백을 열어 미국제 초콜릿과 과자들을 쏟아놓는 모습을 보며,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바깥세상'의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이게 다 미국에서 온 거야?"

"초콜릿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

"와~ 세상에, 이런 과자도 있구나!"


TV: "월남전에 파병된 우리 용사들이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7-8세였던 나에게는 그저 신기하고 달콤한 선물이었지만, 스물일곱 살 어머니에게는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을 것 같다. 언젠가는 내가 직접 아이들에게 이런 좋은 것들을 사줄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어머니의 현실은 여전히 세 아들을 키우고 집안을 꾸려가는 일이었다. 미국제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웃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에는, 이 아이들에게만큼은 더 나은 것들을 해주고 싶다는 간절함이 스며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20대는 집안살림, 시동생 뒷바라지, 가게 일, 자식들 챙기는 일로 참으로 바쁘고 고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없던 힘도 생겨났고, 미래와 희망이 어머니를 이끌었을 것이다.


작은 희망, 큰 결실


196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정부는 멀리 베트남 땅에 젊은이들을 보내고 있었다. 큰외삼촌처럼 수많은 청년들이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낯선 전쟁터로 떠났다. 그들이 돌아올 때 가져온 미국제 과자와 초콜릿은 우리에게 바깥세상의 풍요로움을 보여주었다.


한편 정부는 경부고속도로라는 거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 만에 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포클레인이 산을 깎고 다리를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톱밥과 아교 냄새가 풀풀 나는 가구공장에서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정부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동안, 어머니는 가정에 사랑을 놓아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계셨다.


청년들이 베트남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달콤한 초콜릿처럼, 어머니의 사랑도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선물이었다.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넓어진 보금자리까지, 국수만 먹던 시절에서 직원들과 야유회를 가는 시절까지. 어머니의 행복도 강변에 뿌리내린 미루나무처럼 깊고 단단하게 자라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밤낮 없는 노력과 어머니의 묵묵한 내조가 만나 "조금만 참으면"이라던 약속이 하나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 20대 중반의 이야기였다. 단칸방에서 시작된 작은 희망이 아버지의 노력과 어머니의 내조로 조금씩 큰 결실을 맺어가던, 가족의 터전을 차근차근 만들어가던 소중하고 값진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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