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20 대 " 격동의 10 년, 안동의 하늘 아래 "

by 한시을

20대 3화: 어머니로 완성되어 가는 시간


바깥세상을 엿보며 물어볼 수 없게 된 질문들


1970년, 어머니가 스물여덟이던 해였다. 라디오에서는 새로운 소식들이 연일 흘러나왔다.


라디오: "경부고속도로가 드디어 개통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시간 30분이면..."


TV: "새마을운동이 농촌 마을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붕 개량, 마을길 정비..."


하지만 안동에서는 여전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보다 일상의 소소한 대화가 더 현실적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렸다는데, 구경 한번 보러 가야 하는데."


"안동하고는 크게 달라질 것 없을 것 같은데."


"세상이 참 빨리 변한다 카던데."


어머니는 이런 변화의 소식들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스물아홉 살, 곧 서른이 되는 나이에 바깥세상의 빠른 변화를 실감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질문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한복 입은 어머니와 첫 입학식


내가 7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 어머니는 28세였다. 어머니는 단아하게 한복 차림을 하고, 나는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손을 잡고 걸어서 입학식에 갔다.


입학식장에서는 이런 소리들이 들렸다.


"영수야, 여기 와!"


"엄마, 우리 몇 반이야?"


"1학년 교실이 어디예요?"


"선상님요. 우리 아 좀 부탁하시데이."


입학식에서 줄을 서는 동안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다른 어머니와 다르게 고운 한복으로 차려입은 모습은 아주 오랜 된 스틸 사진처럼 내 기억에 선명하다.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동량들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어머니는 첫아들의 입학을 지켜보며 뿌듯함과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국수만 먹던 시절을 지나 이제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했을까. "조금만 참으면"이라던 약속이 하나씩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 마음 한편에는 복잡한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점점 자라난다는 기쁨과 함께, 이제 정말 어머니 품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미묘한 서운함.


적산가옥에서의 새로운 시작


20대 말에는 2층 목조건물인 적산가옥으로 이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살던 집이었는데, 단칸방에서 시작한 우리 가족에게는 조금은 색다른 곳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도 생겼네."


"부엌도 넓어 음식 준비하기도 편하고."


"시동생들도 따로 방이 있으니 다행이고."


어머니는 이 집을 둘러보시며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이제 여러 방이 있는 집으로. 아버지의 가구점도 안정되었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을 것이다. 시동생들이 장가가면 분가시켜야 하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교육비며 뒷받침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남편의 사업도 더 커져가고 있어 내조할 일은 늘어만 가고, 집안 살림의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었다. 기쁘면서도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넷째의 탄생과 가족의 완성


넷째가 태어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애기가 있어서 너무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웃고 있었다.


"네 동생이란다. 한번 와서 봐...."


왜 웃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속으로 벌써 둘이나 되는데 또 동생이라고 생각했고,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전혀 기억이 없는데 넷째 동생만큼은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축하해 주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네 명이나 낳았네. 대단해."


"아들이 넷이면 든든하겠어."


"아이고... 이제 그만 낳고 좀 쉬어야지."


어머니는 넷째를 품에 안고 어떤 기분이셨을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막막하셨을 것 같다. 아이 넷을 키운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아직 스물아홉이라는 것.


그 무렵부터 어머니의 표정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이 넷을 한꺼번에 돌보며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어머니는 점점 더 침착하고 의연해져 가고 계셨다. 마치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는 나무처럼, 어머니 안에 단단한 중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물어볼 수 없게 된 질문들


사진 속 어머니는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 뒤에 어떤 꿈과 희망이 있었을까. 어머니에게도 결혼 전에 품었던 자신만의 꿈이 있었을까.


라디오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오: "조국 근대화 시대에 맞추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TV: "여성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하지만 1970년 안동에서 스물여덟 살 네 아이의 어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여전히 먼 세상의 일이었다.


동네 젊은 며느리들 사이에서도 조심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요즘 서울에서는 여자들도 직장 다닌다더라."


"그래도 애들 있으면 어떻게 일을 해."


"옛날과는 다른 세상이 온다는데..."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혹시 어머니에게도 다른 꿈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질문들은 이제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의 20대는 집안살림, 시동생 뒷바라지, 가게 일, 자식들 챙기는 일로 참으로 바쁘고 고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없던 힘도 생겨났고, 미래와 희망이 어머니를 이끌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잠든 깊은 밤, 어머니는 홀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스무 살에 시집와서 이제 곧 서른이 되는 나이. 돌이켜보면 정말 빨리 지나간 10년이었다.


이제 와서야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머니는 행복하셨을까. 후회는 없으셨을까. 자신만의 꿈을 포기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셨을까.


시대의 물결과 안방의 꿈


1970년은 대한민국에게 상징적인 해였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서울과 부산이 하루 만에 연결되었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농촌 곳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청계천의 한 청년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분신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태일이라는 스물두 살 청년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TV: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20대 청년이...."


라디오: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하지만 안동의 조용한 적산가옥에서 어머니는 그런 사건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고속도로를 뚫어 전국을 하나로 연결하는 동안, 어머니는 가정에서 사랑의 끈으로 가족을 하나로 묶고 계셨다.


청년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어머니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밤낮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계셨다. 새마을운동이 "잘 살아보세"를 외치는 동안, 어머니는 "잘 키워보세"를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20대가 이렇게 흘러갔다. 정부는 '한강의 기적'을 꿈꾸며 굴뚝을 세우고 도로를 뚫었지만, 안동의 한 집 안방에서는 더 조용하고 더 치열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무 살 새댁에서 스물아홉 살 네 명의 아이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머니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태어났다. 새벽 별에 눈 뜨고 늦은 밤 달을 보고 잠들기까지, 어머니의 하루는 온통 타인을 위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나'를 지워가면서 어머니는 더 큰 '나'가 되어갔다. 연약한 스무 살 처녀가 억척스러운 네 명의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생명력을 품게 되었다.


그 시절 안동은 여전히 조용하고 평온했지만 근대화 개척의 발자국 소리는 분주했다. 그 분주함 속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20대를 온전히 바쳐 네 아이를 품어 안으셨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만든 가족이라는 작은 섬은 언제나 따뜻하고 든든했다.


이것이 어머니의 20대였다. 바깥세상을 엿보며 물어볼 수 없게 된 질문들을 가슴에 품은 채, 조용하지만 위대한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작은 우주를 완성해 가신 소중하고 깊은 시간들이었다.


이전 03화어머니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