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30대 침묵 속의 강인함, 갓바위 아래

by 한시을

4화: 평화로운 일상과 갑작스러운 시련


어머니가 서른 살이던 1972년, 긴박한 소식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TV: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라디오: "비상계엄 선포로 국회는 해산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은 중지되며...."


동네 어른들이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통령이 더 강한 나라 만들겠다고 하시던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어떻게 되는거냐?"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유신은 아직 먼 세상 이야기였다. 서른 살 네 아이의 어머니에게 더 중요한 건 적산가옥에서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적산가옥에서의 꿈 많던 시절


2층 목조건물인 적산가옥에서 우리 가족은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살던 이 집은, 한국인 가족에게는 조금 낯설면서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머니의 하루는 새벽 5시부터 시작되었다.


"얘들아, 일어나라. 학교 가야지."


"어머니, 조금만 더 자면 안 돼요?"


"안 된다. 늦겠어."


아이들을 차례로 깨워 학교 보내고, 아버지와 직원들, 시동생들까지 총 열 명 가까운 식구들의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 어머니는 아이들 아침을 준비하고, 학교 보낼 아이들 챙기고, 삼촌 두 분 뒷바라지에, 직원들의 식사까지 책임지고, 가게 일을 돕고, 저녁에는 집안일을 해야 했다.


가구점도 번창해서 손님들이 자주 찾아왔다.


"여기 물건이 좋지.. 사장님도 좋고..."


"비싸긴 해도 이만한 물건을 찾을 수 있나."


"맞춤으로 만들어주니까 좋지."


그 시절 어머니에게 적산가옥은 단순한 거처 이상의 의미였다. 아버지의 가구 사업이 번창하던 시절, 직원들과 시동생들까지 함께 살며 대가족이 화목하게 지냈던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적산가옥에서의 생활은 어머니에게 조금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다미로 된 방들은 온돌에 익숙한 어머니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다다미는 물이 들어가면 안 돼."


"결 방향을 따라서 쓸어야 해."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지만, 아이들이 뛰어노는 집에서 다다미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름철 장마철이면 어머니의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습도가 높으면 다다미에 곰팡이가 피기 쉬워 하루에 한 시간씩은 반드시 햇볕이 들 때 환기를 시켜야 했다. 한국의 온돌방과 달리 다다미는 방수성이 전혀 없어서, 아이들이 무심코 물을 엎지르거나 음식을 떨어뜨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우리들은 엄청 조심해야 했다.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혼자 감당하는 일에 매일 정성스럽게 집을 가꿔나가셨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적산가옥은 가족이 함께 꿈을 키우던 보금자리였다.


가족 앨범을 뒤적이다 발견한 사진 한 장이 있다. 1976년 봄, 가족 나들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다섯 살배기 막내를 안고 있는 어머니, 그 옆으로 나와 두 동생이 서 있고, 아버지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있었지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사진이 우리 가족의 마지막 평화로운 순간을 담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막내의 사고


1976년 여름, 우리 가족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막내가 다섯 살 때였다. 그때 우리는 다른 동네로 살림집을 이사했고, 가구점과 공장은 원래 살던 곳에 두었다.


학교에서 문화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랄까. 곧바로 가구점과 공장으로 갔지만 부모님은 그곳에도 안 계셨다. 주위에 물어보니 이런 이야기였다. 영업용 택시가 운전 부주의로 가구점 앞에서 혼자 놀고 있는 막내를 향해 돌진했다는 것이다.


"아이고... 막내가 택시에 치어 병원으로 갔단다."


"뇌를 크게 다쳐 안동에서는 수술이 힘들데."


"대구에 있는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급히 갔다고 해."


그때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까.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을 듣고 대구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크게 뇌손상을 입고 숨을 할딱이는 어린 자식을 가슴에 품고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택시를 재촉했을 것이다. 그날따라 택시는 달렸지만 어머니는 달구지를 타고 있었으리라.


그 당시 뇌수술은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만큼 크게 다쳤다. 곧바로 수술실로 들이닥쳤다. 몇 차례 큰 고비를 넘겼다. 다행히 수술과 치료가 잘 되어 막내는 회복해 퇴원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막내 동생은 그때 수술로 큰 흉터를 갖고 있어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본인은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극도의 육체적, 정신적 과로로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1976년 당시 장티푸스는 한국에서 연간 3,000~4,000명이 발생할 정도로 흔한 질병이었지만,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률이 10%에 달하는 위험한 병이었다. 막내를 간병하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지친 몸에 찾아온 병마였다.


동네 사람들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병이 안 날 수 없지.. 마음고생이 오죽했으라고."


"장티푸스라고 하더라."


"막내 때문에 너무 고생하셔서..."


어머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막내의 회복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몸은 점점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어머니에게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동네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누군가는 미역국을 끓여다 주었고, 누군가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뭐라도 먹어야지 회복되지."


"아이들은 걱정 마세요."


"빨리 나으셔야죠."


그런 따뜻한 손길들이 있었기에 어머니도 천천히 회복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다


막내의 사고는 우리 가족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당시는 자동차 보험도,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도 안 되어 아버지가 직접 소송을 전담했고, 이로 인해 가구점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더욱이 막내의 사고와 동시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가구 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드는 수제 가구의 시대가 저물고,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브랜드 가구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의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요즘 브랜드 가구가 좋더라."


"빨리 만들어주는 데가 어디 없나?"


"가격이 좀 비싸네요."


아버지는 변화에 적응하려 애썼다.


"요즘 세상에 맞게 바꿔야 하나?"


"대량생산도 생각해 봐야겠어."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막내의 사고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시대의 변화에 대응할 결정적 시기에 갑작스러운 사고가 겹치면서, 아버지는 급변하는 산업 흐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소송과 간병을 병행하는 동안, 가구 시장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다.


시대의 변화와 장인의 종말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전국의 가구 제작 현장을 휩쓸고 있었다.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디자인의 가구를 빠르고 저렴하게 생산하는 공장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아버지 같은 개인 장인들은 하루아침에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수십 년간 쌓은 목공 기술과 장인 정신은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못했다. 손님들은 "더 싸고 빠른" 브랜드 가구를 원했다. 아버지가 사흘 밤낮을 꼬박 새워 만든 장롱보다, 공장에서 하루 만에 찍어낸 조립식 가구가 더 인기였다.


여러 달을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소송과 간병을 병행하는 동안, 가구 시장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다.


평화에서 시련으로


1970년대는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로 접어든 때였다. 유신체제라는 강력한 국가 주도 하에 중화학공업이 육성되고, 교육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TV: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겠습니다!"


라디오: "새마을운동이 농촌에서 도시와 공장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변화의 그늘에서는 수많은 개인 장인들과 중소 자영업자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정부가 "잘 살아보세"를 외치는 동안, 어머니는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절박함과 마주하고 있었다.


적산가옥에서의 평화로운 시절은 막내의 사고와 함께 끝이 났다. 가족사진 속 환한 미소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단단한 바위가 거센 바람과 비에 깎이면서 더욱 견고해진 듯, 이 시련을 통해 우리 가족은 새로운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평화로운 일상이 갑작스러운 시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적산가옥에서의 꿈 많던 시절이 막내의 사고로 무너져 내렸지만, 어머니는 그 시련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욱 단단해져 가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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