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침묵 속의 강인함, 갓바위 아래
1979년 가을,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진 소식이 전해졌다.
동네 어른들이 모여 앉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네."
"어떻게 이런 일이..."
"앞으로 나라가 어떻게 되는 거냐."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였다. 유신체제와 함께 성장해 온 세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아마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하지만 대통령의 서거보다 더 절실한 일상이 있었다. 서른일곱 살, 네 아들을 키우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안동 시내에 자리한 우리 집은 2층 목조건물 형태의 적산가옥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이 집들은 해방 후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어 1970년대까지도 안동 곳곳에 남아있었다. 경상북도 내륙지역인 안동에도 당시 일본인 관리들과 상인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이런 적산가옥들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76년 안동댐 완공으로 일부 적산가옥들이 수몰되거나 이전되기도 했지만, 우리가 살던 집은 다행히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 집은 단순한 거처 이상의 의미였다. 아버지의 가구 사업이 번창하던 시절, 직원들과 시동생들까지 함께 살며 대가족이 화목하게 지냈던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식 가옥 구조는 온돌에 익숙한 어머니에게는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다다미방 관리였다. 온돌이 아닌 다다미로 깔린 방들은 골풀로 짠 천연소재라 습기에 매우 약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고 진드기가 발생하기 쉬웠다. 특히 다다미에는 '눈'이라고 불리는 섬유의 결 방향이 있어서, 그 방향으로만 빗자루질을 해야 했다. 물걸레 사용은 금물이어서 오직 마른걸레로만 청소가 가능했다.
여름철 장마철이면 어머니의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습도가 높으면 다다미에 곰팡이가 피기 쉬워 하루에 한 시간씩은 반드시 햇볕이 들 때 환기를 시켜야 했다. 평소에도 틈나는 대로 빗자루와 마른걸레로 청소해야 했다. 한국의 온돌방과 달리 다다미는 방수성이 전혀 없어서, 아이들이 무심코 물을 엎지르거나 음식을 떨어뜨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어머니는 즉시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고, 그 자리가 얼룩지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관리해야 했다.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항상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혹시라도 물을 엎지르거나 음식을 흘리는 순간 야단치는 소리는 여지없이 귀를 때렸던 기억이 아직도 쟁쟁하다.
"다다미는 물이 들어가면 안 돼."
"결 방향을 따라서 쓸어야 해."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몇 번이고 당부하셨지만, 네 아들이 뛰어노는 집에서 다다미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겨울철에는 또 다른 고생이 있었다. 일본식 가옥의 구조상 공기 난방이 잘 되지 않아 방이 춥고 눅눅했다. 온돌의 따뜻함에 익숙한 가족들을 위해 어머니는 더 두꺼운 이불을 여러 겹 준비해야 했다. 해가 좋은 날에는 다다미를 말리기 위해 이불을 모두 걷어내고 방문을 활짝 열어두었다가, 저녁이면 다시 이불을 깔아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다미 위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누차 당부하셨지만, 사내아이들의 장난기와 막무가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적산가옥은 가족이 함께 꿈을 키우던 보금자리였다. 아버지의 가구점이 번창하고, 네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시댁 식구들과 직원들까지 한 지붕 아래에서 화목하게 지냈던 그 시절. 비록 매일 다다미 관리에 신경 쓰고, 일본식 가옥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 모든 것이 행복의 일부였다.
가끔 적산가옥에서 살던 시절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어머니의 눈빛이 다른 때와 달랐다.
"그때는 참 좋았는데..."
그 말끝이 항상 흐려졌다. 그 말속에는 단순히 집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번영을 꿈꾸며 살았던 그 시절 전체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다다미를 매일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일본식 가옥의 불편함을 묵묵히 감내하면서도 어머니는 그 공간을 사랑으로 채워갔다. 그것이 어머니의 방식이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적산가옥은 가족이 함께 만들어낸 가장 소중한 추억의 공간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와 가까이 지냈던 이웃 아주머니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분은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정말 손이 맵고 부지런했지. 너희들 키우면서도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을 유지했지. 가끔 내가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하냐'라고 물으면, '습관이 되면 힘들지 않다'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당연한 듯이 나를 쳐다보더라고."
이웃 아주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막내가 교통사고 났을 때 네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거야. 여러 달을 그것도 며칠을 번갈아 대구와 안동을 오가면서도 자식들 식사, 집안일, 가게일까지 다 챙겼으니... 그 강인함은 보통이 아니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게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장면이 그려졌다. 병원과 집을,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모든 것을 홀로 떠안았던 어머니. 하루에 몇 시간이나 주무셨을까. 한 번도 지쳤다고, 힘들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한 번은 네가 중학교 입학할 때였을 거야. 교복을 맞추러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더라고. 우산도 없이 너를 데리고 가는데, 자기 등은 다 젖으면서 너한테 재킷을 덮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말은 한마디도 없었지만, 그게 바로 네 엄마의 사랑이었지."
이웃의 기억 속 어머니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보다는 실천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분이셨다. 그 조용한 헌신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그리고 둘째를 참 자랑스러워했어. '우리 둘째는 과묵하면서도 리더십이 있다'며 육군사관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지. 그 눈빛이 얼마나 빛났는지 몰라."
이웃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하지만 막내 사고 이후로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지. 네 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고, 어머니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어. 그래도 한 번도 누구를 탓하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저 '아이들만 잘 키우면 된다'라고 말하곤 했지."
가계가 어려워져도 어머니는 밥상만큼은 허투루 차리지 않으셨다고 한다. 김치 한 가지라도 제대로 담그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무너지지 않는 마지막 보루였던 것 같다.
어머니에게 꿈이 무너진다는 것은 절망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더 깊은 사랑으로 가족을 지켜내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웃 아주머니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네 어머니 덕분에 너희들은 잘 자랐어. 그 어려운 시기에 네 어머니가 보여준 강인함은 정말 대단했어. 너희에게 결코 내색하지 않았겠지만, 그때 네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나도 느낄 수 있었어.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졌지. 마치 앞으로 닥칠 더 큰 시련을 예감하고 준비하는 것 같았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어머니의 40대가 어떤 시간이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아버지의 변화, 가세의 기울어짐, 그리고 곧 다가올 더 큰 시련까지.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을 것이다. 말없이,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어머니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었다. 삶이 주는 시련들을 하나씩 감당해 내면서, 어머니는 더 강하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이웃 아주머니가 전해주는 어머니의 모습들은 내가 직접 본 것과는 또 다른 면이었다. 가족 안에서의 어머니와 이웃 눈에 비친 어머니는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말없는 사랑과 변함없는 책임감이었다.
"네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 그 시절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일이지. 너희들이 잘 자란 건 다 네 어머니 덕분이야. 잊으면 안 돼"
그 시절 어머니를 지켜본 이웃의 증언은 또 다른 어머니의 삶을 엿보는 창이 되었다. 어머니 자신은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을 이야기들이 이웃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1979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해 중 하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온 나라가 혼돈에 빠졌고, 이듬해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머니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경제적 불안정은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모든 가정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어둠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작은 등불을 꺼뜨리지 않으셨다. 이웃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어떤 시련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 말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든든한 어머니의 모습.
국가가 혼란에 빠져 방향을 잃고 있을 때, 어머니는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셨다. 적산가옥에서의 추억을 간직하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무너진 꿈을 애도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품고, 더 깊어진 눈빛으로 앞으로 올 시간들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웃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결국 한 가정의 존재를 지켜온 보편적인 사랑의 모습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사랑,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헌신, 그리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다.